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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사이언스)‘수학적 사고’가 숫자보다 먼저 등장했다
8000년 전 도자기에 숨겨진 기하학
입력 : 2025-12-18 오전 10:38:55
문자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 인류는 이미 수학적으로 사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약 8000년 전 북메소포타미아의 초기 농경사회가 만든 도자기 문양에서 정교한 기하학과 수적 질서가 확인됐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 요세프 가르핑켈(Yosef Garfinkel) 교수 연구진은 12월5일 국제 학술지 <세계 선사학 저널(Journal of World Prehistory)>에 발표한 논문에서, 기원전 6200~5500년경 북메소포타미아 할라프(Halaf) 문화권의 토기 장식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초기 수학적 사고의 표현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라크 아르파치야에서 출토된 할라프(Halaf) 토기. 대영박물관 및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소장품. (사진=The Hebrew University of Jerusalem, Yosef Garfinkel)
 
식물 문양, 장식을 넘어 ‘구조’를 담았다
 
연구진은 이라크 아르파치야(Arpachiyah)를 포함해 총 29개 유적에서 출토된 할라프 토기를 분석했습니다. 이 토기들에는 꽃, 관목, 가지, 나무 등 식물 문양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이전 선사시대 미술이 주로 인간이나 동물을 묘사했던 것과 뚜렷이 대비됩니다. 일부 식물은 사실적으로, 일부는 추상적으로 표현됐지만 공통점은 명확합니다. 무작위적인 장식이 아니라, 일정한 규칙과 균형을 바탕으로 배치돼 있다는 점입니다. 연구진은 이를 “식물 세계가 처음으로 예술적 주제로 선택된 역사적 순간”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가장 주목되는 대목은 꽃 문양의 배열 방식입니다. 접시와 그릇 표면에는 4개, 8개, 16개, 32개, 많게는 64개의 꽃이 균등하게 배치돼 있는 사례가 반복적으로 발견됐습니다. 공간을 정확히 나누고 반복 패턴을 유지해야만 가능한 구성입니다.
 
연구진은 이런 배열이 우연일 가능성은 낮다고 봤습니다. 숫자를 문자로 기록하지 않았을 뿐, 공간 분할과 수적 순서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가르핑켈 교수는 “이러한 사고는 수확물을 나누거나 공동 경작지를 배분하는 등 일상적 경험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토기에 묘사된 식물 가운데 식량 작물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곡물이나 열매가 아니라 꽃과 관상용 식물이 중심을 이룹니다. 연구진은 이를 농경 기록이나 제의용 표현으로 해석하기 어렵다고 봤습니다.
 
정교하게 그려진 하나의 큰 꽃 그림으로, 6개, 7개, 12개 또는 13개의 꽃잎으로 대칭 배열되어 있는 할라프(Halaf) 문화권 도자기들. (사진=Journal of World Prehistory)
 
대신 꽃이 주는 시각적 즐거움과 긍정적 감정 반응이 장식 대상으로 선택됐을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반복과 대칭, 균형이 만들어내는 미적 쾌감이 이미 당시 사람들에게 중요하게 인식됐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문자 이전 수학, 시각으로 생각
 
기록으로 남은 수학은 훗날 수메르 문명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수메르 문명의 시작이 기원전 약 4500~4000년 정도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번 연구는 수학적 사고의 기원이 훨씬 앞선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기호와 숫자가 아닌, 시각적 패턴과 대칭을 통해 수학적 사고했다는 것입니다.
 
논문의 공저자인 사라 크룰위치(Sarah Krulwich) 연구원은 “이 문양들은 사람들이 균형, 순서, 반복이라는 개념을 이미 예술을 통해 구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며 “수학은 글보다 먼저 시작됐다”고 말했습니다.
 
인류는 숫자를 사용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세상을 수학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번 연구는 문화와 예술 속에 내재된 수학적 사고를 탐구하는 ‘문화수학(ethnomathematics)’ 분야에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보입니다.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daum.net
임삼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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