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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의세상읽기)교사와 아이들을 믿자
2018-12-20 17:15:00 2018-12-20 17:15:00
내가 채 다섯 살이 되기도 전에 나보다 세 살 많은 외삼촌이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살았다. 그가 결혼해서 나가기까지 말이다. 외삼촌이 집에 오자 내 위치가 갑자기 흔들렸다. 난 그때까지 동생 졸병을 하나 거느린 대장이었는데, 그냥 졸병 둘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다. 원래 새 옷은 내 차지였다. 내가 입다가 동생에게 물려주는 게 우리 집의 풍습이었다. 하지만 바뀌었다. 새 옷은 외삼촌이 입었고 나는 그것을 물려 입어야 했지만 동생은 운 좋게 새 옷을 입었다. 옷은 두 번을 물려주기 전에 다 헤졌고 사내아이들이 옷을 깔끔하게 관리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양쪽으로 부러웠다.
 
학교생활마저 외삼촌과 나는 차이가 있었다. 외삼촌은 초등학교 때도 수학여행이란 걸 갔다. 무려 지리산 노고단으로 다녀왔다. 지리산이 얼마나 큰 산인지, 노고단을 정복한 사나이의 기개는 어떤 것인지를 그 후로 5~6년은 더 들었던 것 같다. 그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도 수학여행을 갔다. 고등학교 때는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오면서 내게 서양솜다리, 그러니까 에델바이스 표본을 선물로 사왔다(평생 외삼촌에게 받은 유일한 선물이다. 나는 그에게 선물을 따로 준 적이 없다. 내 존재 자체가 그에게는 큰 선물이니까). 그 공치사를 또 이삼 년은 들어야 했다.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나는 수학여행을 못 갔다. 우리 집이 갑자기 어려워진 게 아니다. 외삼촌이 수학여행을 다녀 온 후 얼마 있으면 꼭 큰 교통사고가 났다. 수학여행객을 태운 관광버스의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아서 사고가 났고 많은 학생들이 죽거나 다쳤다. 당시 기껏해야 4~8면 발행되던 일간지의 반이 수학여행의 문제로 채워졌다. 처방은 항상 똑같았다. 수학여행 금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학교 교장 선생님은 물러나곤 했다. 버스 브레이크가 문제이면 브레이크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지 왜 교장선생님이 책임을 진다는 말인가. 그리고 수학여행만 왜 금지시키나? 다른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차는 안전한가!
 
다행히 나도 고등학교 때는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다. 내 인생의 유일한 수학여행이다. 정말로 웃긴 게 이때는 우리 집이 정말 어려웠다. 수학여행을 갈 형편이 안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여행비를 기꺼이 내주셨고, 철이 없는 아들은 당일 새벽에도 여행가서 쓸 용돈을 요구했다. 엄마는 무려 흰 편지봉투에 용돈을 넣어 주셨다. "무슨 결혼 축의금도 아니고…. 이러실 것까지야…." 흐뭇한 마음에 봉투를 주머니에 넣은 후 엘리베이터에 타서야 봉투를 열어봤다. 3000원이 들어 있었다. 3년 전 외삼촌은 1만원을 가지고 간 걸 내가 빤히 아는데 엄마가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이걸 가지고 가느냐 마느냐를 한참 고민하느라 엘리베이터는 15층까지 몇 차례나 오르락내리락 해야 했다(하지만 당시 모든 고등학생들의 사행성 놀이 '짤짤이'를 통해 용돈을 해결할 수 있었다).
 
청량리에서 열차가 떠난 지 몇 시간 후에 사고가 났다. 누군가가 달리는 열차에 돌을 던졌는데 하필 우리 반에서 키가 제일 큰 친구 이마에 맞았다. 크게 찢어졌다. 그 친구는 담임선생님과 함께 내려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중에 도착했다. 담임이 없는 우리 반의 열차 칸에는 대신 무슨 부장선생님이 오셔서 우리를 관리했다. 우리를 야단치셨다. 떠들지도 못하게 했다. 아니, 우리가 떠들어서 달리는 기차에 돌이 날아온 건 아니지 않은가. 돌 던진 놈이 나쁜 놈인데 왜 우리가 야단을 맞는가.
 
경주에 도착해서도 편하지는 않았다. 겨우 1박을 했는데 선생님들은 우리보고 빨리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셨다. 선생님들도 잘은 모르지만 무슨 심각한 일이 있어서 빨리 돌아오라고 서울에서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우리는 끝까지 버텼다. 나중에야 알고 보니 광주에서 민주항쟁이 일어났고, 군인들의 무차별적인 학살이 자행되고 있었다. 
 
대입 시험을 마친 아이들이 여행을 갔다가 안타깝게도 큰 사고를 당했다. 목이 메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교육부가 사태를 파악하고 여러 조치를 취하고 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걱정이 든다. 사고 원인을 면밀히 분석해 찾아야 한다. 섣부른 희생자를 만들거나 엉뚱한 해법을 만들면 안 된다. 우선 아이들은 잘못이 없다. 교사와 학교도 잘못이 없다. 교육부의 잘못도 아니다. 보일러를 제대로 시공하지 못하고 채 2만원도 하지 않는 가스누출경보기를 설치하지 않고 관리도 제대로 하지 않은 게 잘못일 뿐이다. 괜히 체험학습을 건들지 말자. 교사와 아이들을 믿자.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penguin1004@m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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