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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도, 공정위도 못 막는 조선업 하도급 갑질, 입법으로 근절해야"
20대 국회 발의된 하도급법 개정안 66건 중 41건 아직 계류 중
"하도급법 대신 노동법상 '파견업종'으로 봐야" 의견도
2020-01-30 04:35:18 2020-01-30 04:35:18
[뉴스토마토 최서윤 기자] 국내 대형조선사 사내협력업체로 있다 폐업한 C사 대표 P씨는 도급 계약을 할 때마다 구두로 통보받은 계약금액의 105% 정도 되는 금액을 적은 견적서를 내곤 했다. 이미 계약금이 정해진 상황에서 아무 의미 없었지만 원청은 늘 계약금액 대비 100~110% 수준의 견적금액을 적은 견적서를 ‘형식적으로’ 받아뒀다. 이 형식적 견적서는 후에 ‘원·하청 간 가격협상이 있었다’는 증거로 활용돼 B씨의 피해를 입증하는 데 불리하게 적용됐다. 
 
2013년 전후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조선업 하도급 ‘갑질’의 문제는 ‘선 시공 후 계약’ 관행에 따른 허위 계약서 작성, 원청의 일방적 단가 산정에 의한 ‘대금 후려치기’로 요약된다. 애초부터 견적서든 계약서든 허위다보니 피해를 입증할 수 없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업체들이 민사소송에서 패소했다. 공정거래위원회에 회부돼도 원청이 자사의 단가 산정 기준은 영업 비밀이라며 공개하지 않은 채 ‘협력사들의 인건비 지출액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취지로 다투니, 업체들이 호소한 총 피해액이 수천억원에 달해도 과징금은 100~200억원에 그쳤다. 
 
결국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정교한 입법에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0대 국회에 발의된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하 하도급법)은 총 66건으로, 이중 41건이 아직 계류 중이다. 더불어민주당 제윤경 의원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참여연대는 29일 국회의원회관에서 ‘하도급 불공정 문제해결의 현황과 과제’ 토론회를 열고 조선업 등 산업계에 만연한 하도급 갑질의 입법적 해결책을 모색했다. 
 
더불어민주당 제윤경 의원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참여연대 주최로 국회 의원회관에서 29일 열린 '하도급 불공정 문제해결의 현황과 과제' 토론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최서윤 기자
 
조선업 하도급 갑질 근절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 제시된 건 계약서 등 문서에 단가 산정 기준 등 최대한 상세 내용을 기재토록 강제하는 것이다. 발제를 맡은 김남주 변호사는 “조선업은 특이하게 물량에 단가를 곱하는 게 아니라 물량을 시간으로 환산한 뒤 단가를 곱해서 대금을 결정한다”면서 “물량을 시간으로 환산하는 지수를 ‘표준품셈’이라고 하는데, 이 지수를 업체에 알려주지 않다보니 분쟁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단가 산정 기준을 계약서에 명시하면 투명성이 강화될 뿐 아니라, 상세 내역을 정확히 기재해야 해 선 시공 후 허위 계약을 하는 관행까지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전자문서는 출력과 저장이 가능할 때만 적법한 교부로 인정토록 해 일방적인 삭제를 할 수 없도록 하자고도 했다.  
 
피해기업에는 구제를, 가해기업에는 제재를 강화하는 내용도 있다. 김 변호사는 하도급법에 ‘통상 하도급대금’과 ‘손해배상액’을 추정하는 규정을 넣자고 제안했다. 법원이든 공정위든 통상 하도급대금을 추정할 수 있으면 ‘가격을 얼마만큼 후려쳤는지’를 판단할 수 있고, 객관적인 손해 산정도 가능해진다. 추정 근거로는 조선3사의 하도급 거래 대금을 비교한 ‘제3자 간 거래 대금’이나 별도의 ‘원가계산용역기관’이 산정한 대금, ‘원가와 통상 거래 순이익의 합’ 등을 들었다. 아울러 징벌적 손해배상 대상 하도급법 위반 행위를 확대하고,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법원이 자료제출을 ‘명령’할 수 있도록 해 실효성을 강화하는 한편 건설산업기본법상 건설업자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제재인 ‘영업정지’를 하도급법에도 규정하자고 제안했다.
 
공정위 조사와 법원 소송에서 원청의 조사 방해가 피해 입증에 큰 장애가 되는 만큼 입증 책임을 원청에 두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제 의원은 “결국 입증 책임이 위반 원사업자에게 있는 게 아니다보니 자료 폐기와 증거인멸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게 아닐까 싶다”며 “공정거래를 위협하고 부당한 하도급 거래를 실질적으로 자행하는 기업들이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그것이 불공정하지 않다는 걸 입증해야만 하는 의무를 부여받게 된다면 상당히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매출액의 100%를 원청에 의존하는 조선업 사내하도급의 경우 원사업자와 수급사업자를 대등하게 본 하도급법으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없다는 회의론도 제기됐다. 성경제 공정위 기업거래정책과장은 “지금도 생생한데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 등 조선사 현장조사를 하면서 느낀 건 매출액 전체를 조선사에 의존하다보니 협상력이 없는 것”이라며 “이걸 계속 하도급법 규율대상으로 할지 아니면 노동법상 파견업종으로 가야 할지도 고민해봐야 한다”고 제안했다. 
 
실제 조선업 사내하도급 업체 대표들은 “대표라고 해도 작업자들 월급만 주는 역할이지 인원점검과 출근시간까지 다 원청에서 체크한다”고 말한다. 업체 소속 노동자들 다수도 현재 원청을 상대로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을 제기해 다투고 있다. 다만 울산지법은 최근 현대중공업 협력업체 근로자들이 낸 소송에서 “원청의 업무 지시는 조선사가 선주의 요구사항대로 작업하듯 일의 완성을 위한 지시에 불과하고, 작업인원 보고는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는 취지로 패소 판결한 바 있다.      
        

 
삼성중공업 하도급 피해업체들은 몇 달째 서울 서초동 삼성그룹 사옥 앞에서 농성 중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다음 달 12일 삼성중공업의 하도급법 위반 여부를 심판한다. 사진/삼성중공업 피해대책위 제공
최서윤 기자 sabiduria@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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