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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업 대못 박은 설계 규제)①기술 혁신 막는 설계-시공 업역 칸막이…"글로벌 수주환경서 뒤처져"
일본 등 해외 폭넓은 설계-시공 겸업 인정…"시공하기 좋은 설계만 양산" 우려도
2019-03-25 06:00:00 2019-03-25 06:00:00
[뉴스토마토 최용민 기자] 건설산업 해외수주를 확대하기 위해 종합적인 기술력이 요구되지만 국내 '대못 규제'로 한계에 막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건설사가 설계 영역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는 업역 규제에 대한 것이다. 대기업 독점이나 설계 편의주의 등 업역 폐지 시 부작용에 대한 지적도 만만치 않지만, 설계와 시공 턴키 발주가 트렌드인 글로벌 수주환경에서 현실적인 위기론이 대두되고 있다.
 
24일 업계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는 건설사가 아무리 유능한 건축사를 보유하고 있어도 건축사사무소 설계가 아니면 건축허가를 받지 못한다. 건설사의 설계 겸업에 대한 명시적 금지조항은 없지만 ‘건축사법’ 제23조에 법적 근거가 있다. 해당 조항은 ‘건축사가 건축 사업을 하려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국토교통부장관에게 건축사사무소의 개설신고를 하여야 하고, 상호에는 건축사사무소라는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특히 건축사법 시행령 23조에는 ‘법인이 건축사사무소 개설 신고를 하려는 경우에는 그 대표자가 건축사여야 한다’는 규정으로 인해 사실상 건설사는 설계 겸업을 할 수 없는 상태다.
 
또 ‘건설산업기본법’ 제2조에서 건설산업을 건설업과 건설용역업으로 구분하고 있다. 건설업을 건설공사를 수행하는 업으로, 건설용역업을 조사·설계·감리·사업관리·유지관리 등 건설공사와 관련된 용역을 수행하는 업으로 나뉜다. 특히 토목설계용역은 엔지니어링 업체, 건축설계용역은 건축사사무소, 시공은 종합건설 업체와 전문건설 업체 등으로 업역화 돼 있다. 정부는 이 중 종합건설사와 전문건설사 간 업역 규제를 2021년 공공공사를 시작으로 2022년까지 전면 해제하기로 했다.
 
건설업계가 설계 겸업 허용을 요구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겸업 금지가 기술 발전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시공과정에서 개발된 건설업체의 기술과 공법이 설계에 원활히 반영되지 못해 건설기술 발전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특히 각 분야 느슨한 협업 시스템으로 인해 검토되지 않은 도면들이 현장에 나와 설계도면간의 불일치 등을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대형 건설사들은 회사 내에 설계 인원을 따로 두고 있다. 이들은 설계회사에서 가져온 설계도면 등을 자세하게 검토하는 일을 한다. 비용이 이중으로 들어가는 셈이다.
 
특히 건설사들은 해외입찰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건설업체의 설계 겸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현재는 건설사가 설계사와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해 입찰에 들어가고 있다. 실제 해외 발주자는 시공사에 설계 경험을 요구하고 있고, 단순 시공을 넘어 기획·관리까지 담당하는 건설사업관리업(CM)으로의 전환을 위해 설계 겸업이 필요하다고 목청을 키운다.
 
세계적 추세도 설계와 시공을 함께 묶어 상품으로 제시하고 발주자가 선택하도록 하고 있다. 실제 프랑스, 미국, 영국, 일본 등은 한국처럼 설계업자인 건축사무소만 건축설계가 가능하도록 제한하지 않고, 겸업을 폭넓게 인정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 건설 산업은 시공업체 중심으로 고착화돼 있어 설계나 엔지니어링 업계의 발전을 저해하는 심각한 장애 요인도 지적된다. 미국과 같은 선진국들은 기획, 설계나 엔지니어링과 같은 소프트웨어 분야가 건설 산업을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설계 겸업 주장에 설계회사들은 극렬하게 반발한다. 설계사들은 건설 대기업에 의한 설계시장 잠식은 물론, 건축설계가 시공편의 위주 또는 이윤추구 수단으로 이용돼 설계의 독창성이 상실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시공하기 좋은 형태의 설계만 양산해 결국 값싼 건축물만 만들어내는 등 설계 발전을 저해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특히 건축설계를 공사수주 또는 입찰 때 가격 경쟁의 수단으로 이용해 건축물의 질적 저하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건축설계를 시공 전초단계가 아닌 ‘문화’나 ‘예술’로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건축사가 설계와 감리를 겸업해 시공을 맡은 건설사를 감시하는 기능도 있다. 그런데 시공을 맡은 건설사가 설계까지 맞게 되면 감리 역시 건설사의 영향 아래 놓이기 쉽다는 우려도 제기한다.
 
설계회사들은 또 건축주 입장에서 원하는 설계를 얻기 힘들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일반적으로 건축주와 시공사는 대립 관계일 수밖에 없고, 설계사와 감리사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건축물을 담보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설계업계 관계자는 “건축주 입장에서 건설사와 마찰이 일어날 경우 설계사와 감리사가 자기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건설사가 설계까지 같이 하면 건축주가 원하는 건축물을 얻기 힘들 수 있다”라며 “사실 건설사가 설계를 하게 되면 시공하기 좋은 방향, 아니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자재만 사용할 수 있는 우려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최용민 기자 yongmin03@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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