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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석의 재계시각)희망의 상징서 절망의 아이콘으로…한진중공업 수빅조선소
"노력하면 출세한다", 필리핀 국민에 가능성 제시
2019-01-21 00:00:00 2019-01-21 17:46:54
[뉴스토마토 채명석 기자] 30여개 유력 가문이 권력과 금력을 세습받아 국가의 정치·경제를 주무르고 있다. 한국에는 ‘개천에서 용난다’는 속담이 있으나, 이 나라에서는 운동선수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열심히 공부해 기업에 취업해도 6개월이 채 안되는 계약직 직원 신분이며, 뛰어난 능력을 보여줘도 권력의 위협이 되면 그 자리에서 쫓겨난다고 한다. 먹을 것이 풍부해 굶어죽을 일은 없지만, 출세를 할 수 없으니 그냥 밑바닥 삶을 살아야 한다. 거주지는 지저분하고 비위생적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어 빈부격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필리핀이다.
 
이 나라에 한진중공업은 수빅조선소를 지었다. 이곳에서 일하기 위해 필리핀 전역에서 사람들이 이곳으로 왔다. 회사는 갈 곳 없는 그들에게 한진빌리지를 조성, 집을 마련해줬다. 한국 기준으로는 볼품없지만 이곳 사람들에게는 초호화 주택이다. 학교를 세워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줬고, 정기적으로 의료진이 가서 건강검진을 해줬다. 사람들의 얼굴이 밝아지고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지난 2014년 한진중공업 필리핀 수빅조선소 인근에 마련한 한진빌리지 근로자주택에서 직원 자녀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조선소에 트레이닝센터를 설치해 직원들에게 기술을 가르쳤다. 가르쳐 놓으면 조금이라도 돈을 더 주는 곳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막지 않았다. 이곳을 거쳐 간 직원들이 다른 곳에서 인정받으면 그걸로 만족하다고 했다.
 
필리핀은 주급제이기 때문에 2주마다 급여를 준다. 그런데 급여를 준 다음 날 결근하는 일이 잦다. 손에 쥔 돈을 쓸 때까지 일을 안 하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수입을 예상하고 돈을 끌어다 쓴 뒤 주급을 받으면 갚으러 다니느라 출근을 못한다. 조선소 내에 ATM기계를 설치했더니 결근율이 낮아졌다. 저축 습관을 몸에 익히게 하기 위해 급여의 일부분을 떼어내서 저금을 대신 해줬다. 통장은 조선소장과 담당 직원이 직접 관리하다가 시기가 되면 돌려줬다. 처음으로 목돈을 만져 본 직원들의 감동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조선소의 최종 지향점은 조선소장과 일부 임원들을 제외하고 모든 직책을 필리핀 직원들로 채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직원들을 승진시켰다. 작업반장, 과장, 부장 등 능력을 보이면 그에 맞게 대우를 해줬다. 직원들 사이에서 열심히 하면 출세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이직률이 갈수록 떨어졌고, 인재가 남았다.
 
수빅조선소는 산업적인 면 못지 않게 필리핀 국민들에게 삶의 질을 높이는 방법을 제시한 희망의 존재였다. 필리핀 정부도 이런 점을 높이 사서 많은 상을 수여했다. 그랬던 수빅조선소가 존폐의 기로에 서며 절망의 아이콘이 되어가고 있다. 필리핀 국민들이 또 다시 절망하고 좌절할까봐 걱정이다.
 
채명석 기자 oricms@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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