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기자
(무비게이션)‘데스트랩’, 최소한 이 정도 뻔뻔한 뚝심이라면
2018-12-11 00:00:00 2018-12-11 17:42:50
[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어이 없을 정도로 단순 무식하다. 95분 장편 영화를 구성하면서 등장하는 공간은 딱 한 곳이다. 카메라는 그 한 곳만 바라본다. 그 카메라가 담아낸 인물은 단 3명이다. 그것도 영화 시작 이후 30분이 지날 때까지 딱 한 사람만 나온다. 한 줄 시높을 읽어보고 도대체 이 얘기로 어떻게 장편을 이끌어 냈을까의문만 들었다. 영화 내용도 황당하다. DMZ인근 민통선 지역, 탈옥한 연쇄 살인범을 쫓던 여형사가 지뢰를 밟았다. 도움을 요청할 휴대 전화는 멀리 떨어져 있다. 귀에는 오직 직전 통화만 재발신 할 수 있는 블루투스 헤드셋 그리고 손에는 권총 한 자루다. 여형사가 지뢰를 밟고 있는 공간은 한 눈에 봐도 인적이라곤 기대할 수도 없는 산속이다. 이 여형사는 과연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 영화 데스트랩이다.
 
 
 
영화는 도발적이다 못해 뻔뻔하고, 뻔뻔하다 못해 황당하며 황당하다 못해 강력하다. 그 강력함은 사실 아주 단순 명료하다. 예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도저히 가늠키 어려운 일을 맞닥뜨렸을 때의 반응은 어떨까란 질문을 해보면 된다. ‘데스트랩은 이 단순한 명제를 장편으로 이끌어 낸 오인천 감독의 아이디어와 구성이 돋보인다. 분명 상업적인 요소는 상당히 배제돼 있다. 하지만 의외로 이 지점이 기묘한 흡인력을 갖게 한다.
 
앞선 언급처럼 영화는 러닝타임 30분이 지나도록 여형사 혼자의 고군분투로 이어진다. 온 몸이 굳어질 정도다. 내리쬐는 뙤약볕에 현기증이 날 정도다. 발 아래는 지뢰가 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아니 누군가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포스럽진 않다. 차라리 진짜 공포는 바로 내 발 아래에 있는 지뢰뿐이다. 누군가 와 주길 바랄 뿐이다. 그저 자신이 쫓던 탈주범이라도.
 
영화 '데스트랩' 스틸. 사진/영화맞춤제작소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는 와중에 전화가 걸려온다. 하지만 잘못 걸린 전화다. 여형사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한다. 잘못 걸린 전화에 다시 건다. 지뢰를 밟았다고 호소하지만 믿지 않는다. 자신도 그럴 듯한지 체념한다. 그러다 한 여성이 전화를 걸어왔다. 간절했다. 여형사의 호소에 그 여성은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이상하다. 기괴한 반응이다. 그는 이 여형사를 알고 있는 듯하다. 혹시 이 상황이 짜여진 각본일까. 관객들은 혼란스럽다. 지뢰를 밟고 있는 여형사의 뒤편 멀리 보이는 외딴 건물도 이상하다.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여형사는 혼란스럽다. 온 신경을 집중한다. 생존해야 한다. 하지만 주변을 봐도 인적이라곤 없다. 도망간 탈주범은 보이지도 않는다. 혹시 이 상황에서 탈주범이라도 나타난다면. 여형사는 꼼짝 없이 죽을 수 밖에 없다. 아니 나타나지 않아도 여형사는 죽는다. 그런 혼란 속에서 한 여성이 나타난다. 일본인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황당한 상황이란 말인가.
 
스토리 개연성을 따지는 것도, 구성의 치밀함을 논하는 것도 데스트랩에선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 영화, 괴이할 정도로 집중력을 발휘한다. 사실 그 집중력은 영화가 발산하는 게 아니다.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이 스스로도 모르게 끌어 내는 자의다. ‘데스트랩을 보고 있자면 여형사가 과연 어떤 판단을 하게 될지. 그 판단이 생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지. 그의 생존과 탈주범의 인과관계에 어떤 연관이 있을지. 이 여형사를 누군가 도와주기는 하는 것인지. 지뢰를 밟은 여형사가 어떻게 그리도 태연작약스러운지.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이 영화의 분위기에 빠져들 수 밖에 없게 된다.
 
영화 '데스트랩' 스틸. 사진/영화맞춤제작소
 
2014소녀괴담으로 장편 데뷔 이후 십이야 : 깊고 붉은 열두 개의 밤 Chapter 1’ ‘잡아야 산다’ ‘야경: 죽음의 택시’ ‘월하’ ‘더스트 엔젤등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고하게 구축해 나가는 오인천 감독의 색다른 시도가 바로 데스트랩이다. ‘데스트랩은 올해 4월 미국 애리조나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아 최우수 액션영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 영화제는 해마다 독창적인 주제와 예술적 성취를 이룬 작품을 위주로 선정하는 전통 있는 영화제다.
 
분명 극단적으로 단순하다. 공간 변화가 거의 제로에 가깝기에 관객 입장에서 분명 그렇다. 하지만 그 단순함이 때로는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지금도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상업 영화가 이중 삼중 반전을 노린 복합 구성과 이종교배로 불리는 장르의 무리한 교집합이 연출의 새로운 미덕으로 주목을 받는다. 그런 면에서 데스트랩은 완벽하게 역행한다. 하지만 그 역행이 오히려 더욱 강력함을 발휘했다.
 
영화 '데스트랩' 스틸. 사진/영화맞춤제작소
 
95분의 러닝타임이 꽤 기괴하게 다가올 것이다. 최소한 데스트랩은 그걸 잡아냈다. B급 장르의 뚝심과 뻔뻔함을. 그게 미덕이란 것까지 증명했다
 
김재범 기자 kjb517@etomato.com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지난 뉴스레터 보기 구독하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