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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칼럼)철강사 담합과 공정위의 '무도리'
2018-10-18 15:27:14 2018-10-18 17:29:17
지난 2009년 4월. e스포츠인 스타크래프트 게임 대회 도중 관객과 시청자들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컴퓨터에 이상이 발생해 경기 중단을 요청한 선수가 몰수패를 당한 것이다. 중단을 요청하려면 게임 채팅창에 'ppp'라고 쳐야 하는데, 'pp'만 입력했기 때문에 규정 위반에 따른 실격이라는 이유였다. 1초의 실수로 승패가 엇갈리는 게임 특성상 경기를 제대로 하기 어려워진 선수가 pp를 친 건 누가 봐도 다급하게 중단을 요청하는 신호였기에, 규정을 문자 그대로만 해석해서 내린 이 판정은 다수의 공감을 얻지 못했고 현재도 유튜브 등을 통해 영상이 공유되며 마니아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황세준 기자
규정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때로는 상황에 맞게 해석해서 적용해야 할 필요도 있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의 철강사 담합사건 제재도 비슷한 맥락에서 철강업계의 비판을 받고 있다. 공정위는 지난달 9일 현대제철, 동국제강, 한국철강, 대한제강, 환영철강, 와이케이스틸 등 6곳이 철근 판매가격 할인폭을 축소키로 합의했다며 총 1194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한다고 밝혔다. 철강사들이 공정위의 '의결서'를 받으면 제재 효력이 발생한다. 각 사는 의결서를 받는대로 행정소송 제기 여부를 검토한다는 입장이다. 행정소송이 진행되면 고등법원이 사건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사법부가 '행정존중'과 '법해석' 중 어디에 비중을 두는지에 따라 철강사들의 희비는 엇갈릴 전망이다.
 
공정위는 철강사 영업팀장들이 서울 마포구 식당과 카페에 모이거나 전화통화를 한 점을 담합의 결정적 증거로 판단했다. 이것만 놓고 보면 공정거래법상 '공동행위의 유형' 중 하나인 '가격의 결정·유지·변경, 가격인상, 인하, 유지하는 행위를 할 것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합의하는 경우'에 해당할 수 있다. 그러나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막는다'는 담합 제재의 목적 측면에서 보면 맥락을 고려해 법을 해석치 않고 곧이곧대로 적용한 제제일 수 있다.
 
이 사건에서 철근 소비자는 건설사와 유통업체, 판매자는 철강사다. 철강업계에 따르면 할인폭을 조정하는 것은 시장가격 폭락을 방어하기 위해 정부의 권고로 채택한 가격결정 방식이다. 건설사 측 실무자와 철근 제조사 측 실무자들이 대표로 만나는 '철근가격협의체'를 통해 분기 단위로 가격을 정하면 유통 시세에도 반영되는 구조다. 자연스레 협상 테이블에서 건설사들과 철강사들의 제시 가격이 공유될 수밖에 없다. 협의체 가동으로 철강사들이 이득을 본 것도 아니다. '갑'의 위치에 있는 건설사의 할인 요구에 고철 등 원재료값 인상 요인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더욱이 공정위 발표를 보면 기업별 철근가격 할인폭은 같지 않다. 국내 업체들끼리만 경쟁하는 게 아니라 중국산 등 수입재가 유입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담합을 통한 가격 유지는 어렵다는 게 철강업계의 설명이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달 28일 공정위에 제출한 공정거래법 전면개정 입법예고안에 대한 건의문에 '정보교환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달라'는 내용을 포함한 것은 그간 공정위의 제재가 무도리('유도리'의 반대의미로 속어)하게 이뤄졌다는 방증이 아닌지 고민해 볼 대목이다.
 
황세준 산업1부 중공업팀장 hsj1212@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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