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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문명으로 읽는 기업)⑪DB, 제후국 리더십을 벗어나 ‘평천하’하라
2018-06-25 07:00:00 2018-06-25 07:00:00
500년 역사의 조선은 왜 몰락했을까. 태생적 한계 속에 몰락이 예정돼 있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16세기 대항해시대에서 일본은 세계화 흐름을 따랐지만, 조선은 거꾸로 갔다. 1492년 서양은 신대륙 발견 이후 식민지 개척과 동양 무역에 열을 올렸고, 동양에서 명나라는 세계 최대 은 수요국이었으며, 일본은 스페인에 이어 세계 2번째의 은 수출국이었다. 조선은 연산군 때부터 은 제련기술을 개발하고서도 세계 경제의 흐름을 놓쳤다. 이때부터 조선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16세기는 세계 사상사와 철학의 격변기이기도 했다. 서양에서는 종교개혁을 계기로 가톨릭의 새로운 영성운동을 비롯한 각종 종교운동이 시작됐다. 조선에서는 명나라가 몰락하고 청나라가 건국되는 과정에서 병자호란을 겪었으면서도 명나라를 그리워하고 청나라를 거부하는 '소중화(小中華)'의 길을 걸었다.
 
조선 건국의 '중화주의'에서부터 비롯된 몰락의 운명
 
명나라가 무너져 '평천하(平天下)'를 할 천자가 몰락했다면 조선은 당연히 '대중화(大中華)'를 선언해야 했는데, 왜 소중화를 주창했을까. 이는 조선의 건국에서부터 비롯된다. 조선 건국의 분수령이 된 위화도 회군에서 회군파는 요동 정벌을 포기하는 4대 명분을 제시했다. 가장 큰 명분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망해 가는 원나라는 북쪽으로 쫓겨나고 있었고 신생국 명나라는 강남에서 거병해 아직 요동을 차지할 능력도 없었다. 요동은 무주공산이었지만 이성계는 중화주의를 강조했다. 현실적으로는 고려 권력을 빼앗으려는 술책이었겠으나 심리에는 스스로를 제국이 아닌 제후국이라고 간주한 인식이 깔렸다. 여기서 조선의 미래는 결정 났다. 실제로 조선은 건국 후 사대교린(事大交隣)을 외교기조로 내세웠다. 제후국의 전형적 정책이다. 자신을 제후국으로 옥죈 이 정치적 상상력은 조선사 전체를 관통한다. 조선의 낡은 정책의 원형도 여기에 있다. 조선 최고의 군주로 칭송받는 세종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조선 왕실의 난독증이다. 태조 이성계와 태종, 세종 모두 <대학연의>를 읽었다고 전한다. <대학>이 군자론을 다루는 일반 수양서라면 <대학연의>는 <대학>의 내용을 제왕의 입장에서 재해석한 책이다. 이 책을 조선의 창업군주부터 대대로 숙독했다면 그 내용대로 조선은 제후국이 아니라 제왕이 통치하는 제국 곧 '천하국가(天下國家)'를 지향하고 이 원칙대로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 그런데 조선은 '글 따로 현실 따로'였다. 조선 500년사는 <대학연의>의 난독증을 제도화한 것과 다름없다. 조선은 세계의 격변기 속에서 대중화(大中華)를 추진하는 게 아니라 예송논쟁이나 벌였다. 상상력의 크기는 곧 국가의 크기다. 청나라는 조선보다 훨씬 적은 인구를 갖고도 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했다.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원나라도 군대는 10만명 남짓이었다. 반면에 조선은 스스로를 제후국으로 격하함으로써 국가적인 상상력을 소진했다. 창조적 상상력은 퇴락을 거듭, 결국은 19세기에는 열강의 각축장으로, 식민지로 전락했다. 
 
사진/뉴스토마토
 
한국 기업 가운데 창조적 상상력의 빈곤으로 조선이 몰락한 것과 같은 길을 걷는 곳은 DB그룹이다. 조선이 건국 후 500년 만에 식민지 신세가 된 것은 정치적으로는 겨울에 들어간 꼴이다. DB그룹의 기업 생애주기도 한겨울에 들어가는 초입이다. 그만큼 어려움을 겪고 있다. 원인은 지금 이 시점에 있는 게 아니다. DB그룹의 기업사를 들여다보면 창업 당시의 기업가적 모험정신은 사라졌고 안전 위주의 2등 전략에 편승했다. DB그룹이 다시 회생할 수 있는 길은 2등 전략인 제후국의 리더십을 버리고 현실안주형 전략을 과감히 탈피, 글로벌 경쟁시장에서 선두에 서겠다는 '평천하'의 기개와 담대함이다.
 
기업가 정신 잃은 DB그룹, 평천하 기개 찾아야
 
DB그룹도 삼성처럼 글로벌 기업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조금 더 도전적이고 과감한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했다면 DB그룹과 처지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우선 동부제철의 전기로 사업은 포스코와는 다른 길을 걸으며 세계적 철강기업으로 성장할 뻔했다. 지금도 이 기회는 유효하다. 일반적으로 제철기업은 용강로인 고로를 갖고 있고, 제강기업은 그 보다 한 단계 아래인 전기로를 갖고 있다. 제철기업은 철강업의 용강로에서 열연재를 생산하고, 전기로기업은 열연재나 고철을 전기로에서 냉연재로 1차 가공을 하는 기업이 있다. 시장에서는 포스코의 고로 방식이 가장 앞선 기술이고 동부제철의 전기로는 그 다음으로 쳐준다. 그런데 동부제철이 애초부터 2등 방식인 전기로를 채택하지 않고 미국의 최대 전기로 기업인 뉴코어를 벤치마킹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룹 내에서 몇가지 장애가 발생하자. 글로벌 경영정책을 포기하고 내수형 제강기업에 안주해버렸다.
 
DB그룹의 모체는 김준기 전 화장이 1969년 설립한 미륭건설이다. 미륭건설은 1981년 제1회 '건설의 날' 기념식 건설유공자 표창 금상을 받았다. 사진/문화체육관광부
 
반도체 역시 DB그룹이 글로벌 기업이 될 기회가 있었다. DB하이텍은 시스템 반도체 산업기반을 갖추고 있다. 이런 기술환경을 바탕으로 DB그룹은 반도체시장 초기부터 시장 진출을 모색했다. 하지만 당시 반도체 사업을 주도한 삼성이나 현대 등의 집중 견제를 받고 결국 시장 진출을 포기했다. 이 시기에 DB그룹이 삼성과 현대 등과 과감히 경쟁하면서 글로벌 반도체 기업으로서의 경영전략을 모색했다면 지금 DB의 지위는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매번 도전적인 기업가 정신보다 안전지향적 전략을 채택했다. 잠재력을 갖고도 성장하지 못했다. 조선이 개국 초기에 무주공산 요동지역을 스스로 포기한 것처럼 DB그룹은 스스로 기회를 날렸다. 그룹의 안정지향성이 지금 그룹의 위기를 낳았다.
 
DB그룹의 기업리더십은 <주역>의 '박(剝)괘'에 해당한다. 박괘에 있는 기업의 생애주기에서는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진입하는 시기다. 세상 만물은 생겨나면 성장하고 업적을 이루지만 그 뒤에는 죽는 길에 접어든다. 어떤 일은 몇년 만에 다 이루어지고 어떤 일은 백년이 걸리는 일도 있다. 기업도 현실안주형 전략을 구사하면 그 생애주기가 짧고,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면 100년 이상 영속될 수 있다. DB그룹은 지금 위기에 처했다. 재계순위는 계속 낮아지고 핵심 자산은 매각되면서 사세가 쪼그라들었다. 총수의 도덕성까지 문제가 됐다. 동아시아문명의 관점에서 볼 때 천하의 국사(國事)도 하는 노릇을 봐서, 수명이 결정된다. 글로벌 경영전략을 추구할 때 기업의 생애주기는 새롭게 시작된다. 대통령이나 군왕의 지위가 높다고 하지만 백성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DB그룹이 어려움을 겪을수록 총수일가 이익보다 사회공헌과 직원들의 복리를 추구해야 한다. DB그룹은 창조적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 2등 전략인 제후국의 리더십이 아니라 글로벌 천하경영의 비전을 갖느냐에 따라 겨울을 잘 견뎌내고 다시 봄을 맞게 될 것이다. 
 
2017년 11월1일은 DB그룹은 새 CI(Corporate Identity) 선포식을 열고 그룹명을 기존 '동부'에서 'DB'로 교체했다. 사진/DB그룹
 
DB그룹의 글로벌 네트워크는 '곤(困)괘'다. 기업리더십처럼 글로벌 역량에서도 곤란함에 처했음을 의미한다. 원래 물은 못 위에 있는 것인데, 못 아래에 물이 있으니 정작 못에는 물이 빠진 형상이다. 그래서 물이 고갈되니 곤란하게 된다. DB그룹은 2000년대 들어 유동성 위기를 겪으면서 동부대우전자나 팜한농 등을 매각했고, 글로벌 네트워크와의 연결고리를 잃어버렸다. DB그룹이 이 어려운 시절을 극복하려면 그나마 글로벌 역량이 남아 있는 동부메탈의 전기로 사업을 혁신해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기업리더십·글로벌 네트워크·계열사 모두 '한겨울'
 
DB그룹의 계열사는 '산 넘어 산'을 의미하는 '간(艮)괘'다. 산이란 무겁되 편안하고 독실하다는 뜻을 가졌다. 그래서 산이라는 것은 단지 장애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산을 만나 하던 일을 그치는 것도 분수에 맞게 편안하고 넉넉함을 알아야만 그칠 수 있다. 욕심이 지나치면 산을 만나도 중간에 그치지 못하고 망령되게 산을 넘고자 헛된 힘을 쓰게 된다. 신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 DB그룹은 한겨울에 처했고, 계열사들에는 어느 때보다 신중한 경영이 요구된다. DB그룹은 현재 DB손해보험·DB생명·DB금융투자 ·DB저축은행·DB하이텍·DB메탈·DB라이텍 등 주력 계열사다. DB그룹은 과거 '동부'라는 이름을 썼지만, 지난해 11월 경영혁신 차원에서 그룹명을 'DB'로 변경하고 계열사 이름도 바꿨다. 한겨울을 넘기 위해 기존의 자신을 버렸다. 언론보도를 보면 'DB’에는 "큰 꿈과 이상을 가지고 미래를 준비하겠다"는 뜻을 담은 'Dream Big'의 의미도 담겨 있다. 이름은 바꿨지만, 그룹의 새로운 로고는 기존 동부의 로고 색상인 주황색과 녹색을 사용하면서도 '젊음'을 의미하는 청색을 더했다. 그룹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미래를 향한 의지와 희망을 표현했다는 게 언론의 설명이다. 기왕 이름을 바꾸고 재도약을 꿈꾼다면 이 시기에는 기어이 산을 넘고자 욕심을 부리지 말고 잠시 신중해야 한다. 대인은 남의 말에 귀 기울이고 대중을 먼저 살핀다.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려고 하지 않는다.
 
DB하이텍 부천공장 전경. 사진/DB하이텍
 
반면 흥미로운 점은 DB그룸의 협력사들은 자중자애를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명이(明夷)괘'다. 명이는 '밝은 것이 상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명이의 시대에, 명이의 처지가 되면 간난함을 견디고 참아 바른 도를 지키면서 그 밝음을 나타내지 않는다. 주나라 문왕은 은나라 주왕의 폭정 때 밝은 지혜와 두터운 덕을 감추고 '유리'라는 감옥에 19년을 갇혀 있었다. 난세에는 이처럼 밝은 사람이 다치게 마련이다. 파운드리 세계 1위 기업인 DB하이텍은 국내의 중소 팹리스들과 함께 국내 시스템반도체 산업 기반을 넓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3년 DB하이텍은 국제경쟁력 확보가 시급한 국내 중소 팹리스들을 위해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산업통상자원부와 함께 '중소 팹리스 글로벌 상생협력 지원 협의체'를 발족하기도 했다. 협의체에서 DB하이텍은 팹리스와 반도체 공동 개발, 차별화된 기술 인프라(설계자산, 생산공정기술) 제공, 해외 바이어에게 팹리스의 반도체 납기 및 품질 보증 등을 맡았었다. DB그룹의 협력사 중 반도체 산업의 기반이 되는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는 기업들은 국내의 좁은 시장이 아니라 글로벌 시장으로 사업을 다각화한다면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것이다.
 
DB그룹의 직원들은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계기 안에 있다는 '무망(无妄)괘'다. 흔히 말하는 '망령됐다'는 말은 안 할 짓을 하는 것을 뜻한다. 엉뚱한 생각을 한다던가, 사사로운 행동을 한다던가 갑자기 올라오는 기운 때문에 맑은 정신이 가로막히는 것이다. 그것이 없어지면 한결같은 진실함만이 있으므로 무망에서 비로소 길이 열린다. DB그룹이 한겨울에 처한 것은 직원들 역시 겨울을 견뎌내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룹 이름을 바꾸면서 새로운 경영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은 직원들도 새로운 봄을 맞기 위해 간절히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다. 천둥이 치면 엎드려 있던 곤충들이 움직여서 나온다. 경칩에는 개구리도 나오고, 뱀도 나오는 때다. 초목들도 땅속에 박혀 있다가 움이 터져 나온다. 이렇게 만물이 막 태어나려는 찰나이기에 무망괘가 된다.

임채원 경희대학교 교수
 
* 필자 소개 : 필자 임채원은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다. 서울대 종교학과 졸업 후 동대학원 행정학 석·박사를 수료하고 동대학 한국행정연구소와 국가리더십센터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경희대에서는 세계화와 사회정책 등 글로벌 어젠다와 동아시아 문명의 국정운영을 연구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 등 20여개 중앙·주정부의 정책 어젠다를 공동 연구하는 '비교어젠다 프로젝트'에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참여 중이다. 이번 기획은 필자가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연구와 실천을 토대로 동아시아 문명의 가능성과 미래에 관해 <뉴스토마토>에 격주로 총 13회로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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