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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진화하는 '을의 연대'
2018-05-14 15:48:32 2018-05-14 15:56:19
구태우 산업1부 기자
"누군가 나서겠지 하면 대한항공은 절대 안 바뀝니다!"
 
최근 대한항공 직원들이 참여한 카카오톡 익명 채팅방에는 동료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글이 꾸준히 올라온다. 이 글의 작성자는 현재 채팅방을 이끄는 관리자다. 현재 운영되는 채팅방만 4개(대한항공 3개, 진에어 1개)다. 인원도 3500명에 육박한다. 제보를 기다리는 기자들도 다수 있다.
 
그가 이 글을 쓴 건 이른바 '을의 반란' 동력이 떨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축배를 들 때도, 방심할 때도 아니다는 절박함이 담겼다. 한 직원은 "재판에서 흐지부지될 여지도 많다"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여론은 분명 직원들 편이지만, 처벌까지 이어질 지는 알 수 없다. 갑질 논란을 일으킨 조양호 회장의 두 딸이 물러났지만, 대한항공은 여전히 조 회장 일가의 영향력 아래 있다.
 
그래서일까. 대한항공 직원들도 결집을 강화하고 있다. 장기전을 할 채비도 갖췄다. 관리자가 힘겹게 운영했던 구조에서 조직화된 팀 체계로 바꿀 계획이다. 운항, 정비, 객실 등 직종별로 구성할 계획이다. 조 회장 일가의 비위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 수사기관에 협조하겠다는 게 이들의 구상이다. 조 회장 일가 퇴진을 요구하고 있는 '을의 연대'는 처음보다 진화했다. 언론에 총수 일가의 갑질을 제보했던 게 '시즌1'이라면, 지금은 '시즌2'로 규정할 수 있다.
 
대한항공 직원들의 싸움은 시민운동을 닮았다. 직원들은 자발적으로 뭉쳤다. 논쟁거리가 생기면 갑론을박하면서도, 질서를 만들어 냈다. 노조, 정당, 언론을 헐뜯지 않기로 규칙도 정했다. 서로가 등을 돌리지 않기 위해서다. 그렇게 집단지성이 생겼다. 퇴진운동이 지속될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의 목적이 이해가 아닌 오직 조 회장 일가의 퇴진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명예회복을 원하고 있다. 조 회장 일가의 대한항공이 아닌 우리의 대한항공이길 원한다. 그래서 두 차례의 촛불집회 구호도 '사랑한다 대한항공. 지켜내자 대한항공'이었다. 땅콩회항에 물벼락 갑질 등 조 회장 일가의 그릇된 일탈로 대한항공 명예는 추락했다. 밀수에 조세 탈루 등 갖은 범죄 혐의도 더해졌다. 시민들은 대한항공의 상징이던 '태극' 문양과 '대한' 사명에 더해 국적기 자격마저 박탈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랑스럽게 여겼던 대한항공 정복이 부끄러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 모두 총수 일가의 전근대적 행태에서 비롯됐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테랑'에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대사가 있다. 철부지 조현민씨가 던진 건 물컵이었지만, 무너진 건 직원들의 자긍심이었다. '천년의 어둠도 촛불 하나로 꺼진다'는 인도 속담이 있다. 군사정권의 비호로 쌓아올린 한진의 부와 권세가 흔들리고 있다. 이와 함께 갑이라는 이유로 을에게 저질렀던 이유 없는 횡포에도 제동이 걸렸다. 물컵의 나비효과가 이럴 줄이야.
 
구태우 산업1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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