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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보는 일상사-2화)풀빵의 힘
“풀빵 열 개의 점심 뒤 세상이 잘 보였다”
2018-02-26 06:00:00 2018-02-26 09:00:15
2018년 2월7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사회연대네트워크와 참여연대 주최로 ‘최저임금 1만원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라는 주제의 토론회가 열렸다. 그런데 한 언론에 보도된 문성현 노사정 위원장의 발언이 눈에 띈다. 그는 재단사로 정규직이었던 전태일 열사가 자신의 차비를 아껴 일명 ‘시다’(보조)로 불리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풀빵을 사주곤 했던 일화를 언급했는데,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노동자들이 열심히 투쟁한 성과를 나눠줘야 한다는” 의미에서 최저임금 1만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전태일의 ‘풀빵 정신’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 전태일다리에 한 시민이 둘러준 목도리를 하고 있는 전태일 동상. 사진/뉴시스
 
서민의 음식, 풀빵의 출현
밀가루를 물에 개고 끓여 풀을 쑤던 시절, 비슷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하여 ‘풀빵’이라 이름 붙여진 길거리 음식이 있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모양과 이름을 달리해 국화빵·붕어빵·오방떡·잉어빵 등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모두 풀빵의 일가라 하겠다. 설탕이나 팥이 귀해 소금과 소다만 들어가던 묽은 밀가루 반죽 풀빵을 기억하는 6·25세대부터, 여러 재료가 첨가된 반죽에 핵심 성분인 팥소가―여전히 지배적임에도 불구하고―다양한 소들에 의해 대체되는 풀빵류를 맛보는 요즘 어린이들에 이르기까지, 아마도 우리 국민의 대다수가 각자의 풀빵을 기억할 것이다. 지금도 거리나 골목의 작은 포장마차에서, 길모퉁이나 시장 한 편의 노점에서 만나는 풀빵 가족들이 누군가에게는 정겨운 추억 한 자락을 상기시킬 수도 있겠다.
 
보통 풀빵류의 원조를 에도 시기의 이마가와야끼에서 찾는데, 에도 시대(1603~1868) 연호 안에이(1772~1781) 때 도쿄 간다 지역의 이마가와 다리 근처에서 팔기 시작했다하여 ‘이마가와야끼’라 불리기도 하고, 당시에 사용되던 타원형의 큰 금화(오방·大判) 모양을 닮았다 해서 ‘오방야끼’라고도 불렸다. 그 밖에도 지역에 따라 상이한 이름으로 불리던 이 빵은 이후 메이지 시대(1868~1912)에 도쿄의 한 가게에서 도미 모양의 ‘다이야끼’로 변형되었고, 1930년대 일제강점기 하의 조선 땅에 들어와 붕어빵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야끼’가 ‘구은 것’을 뜻하니, 오방모양구이는 오방떡으로, 도미모양구이는 붕어빵으로 바뀐 셈이다.
 
군산 경포천 서래 갈대밭 지나
배달성냥공장 앞거리에는
나포면 고자가 와
붕어빵 구워 파는데
썩은 복쟁이 먹고
고자 된 고자
 
맛있는 붕어빵 파는데
아이들끼리는 거기 가 사먹어도
어른은 거기 못 가게 한다
이놈들아
거기 가 붕어빵 사먹으면
네놈들 장가가야 허탕이다
아들 하나도 못 낳고
딸도 못 낳는다
고자가 만든 빵 사먹으면
그러나 아이들 몰래 거기 간다
그 고자 마음씨 좋아
붕어빵 하나 달라면
둘 주고 한마디
오늘은 그만 먹어라
단것 너무 먹으면 쓴것 된단다
< ... >
(‘나포 고자’, 5권)
 
세대에 따라 ‘풀빵’ 하면 ‘국화빵’을 떠올리기도 하는데, 국화가 일본 황실을 상징하고 황실의 문장(紋章)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일본과 얽힌 한반도의 역사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풀빵, 생존을 위한 현실
1933년 8월5일자 동아일보에는 “밀가루 쓰는 법 아는 법”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는데, 차진 밀가루와 차지지 못한 밀가루가 있으니 그 소용에 따라 구분해 사용할 것을 권하고 두 밀가루의 구별 방법도 알려주고 있다. 밀가루가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 시대에도 ‘진가루(眞末)’라고 불릴 만큼 귀해 궁중과 양반 세도가들의 큰 연회에서나 가끔 먹을 수 있었고, 국수도 밀가루가 아니라 메밀가루로 만들어 먹었다하니 조선의 백성들에게 밀가루는 매우 낯선 식재료였을 것이다. 풀빵이 등장한 일제강점기에는 밀가루가 보다 확산됐겠지만, 거주지(도시, 시골)나 생활수준에 따라 민중에게는 여전히 거리감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계기로 밀가루가 구호물자로 대량 유입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된다. 밀가루를 물에 풀어 구운 풀빵은 허기를 때우는 중요한 음식이었고, 풀빵 장사는 전쟁 통에 본업을 잃어버리고 생계가 막막해진―다수가 농민이던―피난민들에게 중요한 생계수단이 되었다. 1964년 11월4일자 마산일보에는 “빵틀대 여자에 밀가루를 지급”이라는 제목으로 다음의 기사가 보인다. “항구적인 생계보조를 위해 영세 서민 55세대에 ‘빵틀’을 대여한 바 있는 마산시는 4일 이들에게 자금조로 소맥분 65kg을 무상으로 지급했다. 이들은 그동안 장사 밑천이 모자라 소맥분 구입에 고충을 받아왔다.”
 
6·25 이후 1960~1970년대에도 풀빵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중한 ‘일용할 양식’이었다. 쌀은 부족하고 미국산 밀가루는 넘쳐나던 이 시절, 정부의 ‘혼·분식 장려운동’은 학생들의 도시락 검사를 낳아 잡곡이 30퍼센트 섞여 있지 않은 도시락의 주인은 점심시간에 긴장하거나 떨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절, 가혹한 노동 환경 속에서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던 청계천 노동자들을 위로한 전태일(1948~1970) 열사의 풀빵 일화가 탄생한다.
 
지난 2010년 미국 코네티컷대 명예교수가 기증한 6·25 동란 당시 피란지 부산의 모습을 촬영한 컬러 영상에 풀빵·국수 장수가 등장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버스비와 맞바꾼 전태일 열사의 풀빵
전태일은 만 16세이던 1964년 상경해 청계천 평화시장의 의류제조회사에서 ‘시다’(견습공)로 시작했고 이후 재단사가 되었다. 아침 8시 반부터 밤 11시까지, 점심 도시락을 먹을 때 외엔 화장실도 거의 가지 못하고 일하는―평화시장 2층 공중변소 3개를 2000명 이상이 사용했다고 하니 줄서기를 포기하는 쪽이 빨랐으리라―노동 조건에 위생 상태도 엉망이거니와, 야근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때로는 점심도 거르며 혹사당하는 것이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현실이었다. 일 끝나고 돌아갈 집이라도 있는 자신보다 더 열악한 환경 속에 놓여 있던 10대의 어린 ‘여공’ ‘시다’들이 배를 곯는 모습을 본 스무 살도 채 안 된 청년 전태일은 다음과 같이 행동한다.
 
그 당시만 해도 도봉산까지 가는 버스가 없어서 일이 끝나고 밤늦게 도봉산 집까지 가려면, 미아리종점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거기서 내려서 한 시간 남짓 걸어야만 했다. 때때로 그는 점심을 굶고 있는 시다들에게 버스값을 털어서 1원짜리 풀빵을 사주고 청계천 6가부터 도봉산까지 두세 시간을 걸어가기도 했다. 일이 늦게 끝나는 날은 주린 창자를 안고 온종일 시달린 몸으로 다리를 허청거리며 미아리까지 걸어가면 밤 12시 통금시간이 되어 야경꾼에게 붙잡혀 파출소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에 다시 도봉산까지 걸어서 집에 당도하는 일도 있었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는 사이에 파출소 순경들도 사정을 알고 그냥 통과시켜 밤 한 시, 두 시가 지나 집에 돌아오는 일이 버릇처럼 되었는데, 이것은 그 뒤 그가 죽을 때까지 3~4년 동안 계속되었다. (조영래, <전태일 평전>, 돌베개, 1991, 120쪽)
 
풀빵으로 허기를 달래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여공’의 현실을 고발한 동일방직노동자 석정남의 수기 <공장의 불빛>(1984)(월간 <대화>에 1976년 11~12월 ‘어느 여공의 일기’라는 부제와 함께 ‘인간답게 살고 싶다’, ‘불타는 눈물’로 최초 연재)에서, “그 처녀는 공장 구석구석을그려냈다 / 그 처녀는 공장 밖의 세상도 생생하게 그려냈다 / 풀빵 열 개의 점심 뒤 세상이 잘 보였다 / 누군가가 대변하지 않아도 되었다”(‘석정남’, 13권).
 
풀빵으로 허기를 채운 덕분에 물리적으로(눈이 밝아져) 세상이 잘 보이는 것이든, 풀빵으로 점심을 때울 수밖에 없는 혹독한 노동 현실을 인식함으로써 자신이 속한 세상이, 그 세상의 현실이 잘 보이는 것이든, 풀빵의 힘은 크고 깊다.
 
전태일 이후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옆
혹은 그 뒤
전태일의 아우
전태삼의 옆
전순옥의 옆
항상 민종덕이 잠자코 서 있다
 
청계피복노조의 살림꾼
공장에서나
공장 밖에서나
그는 감시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그 감시를 떨쳐야 하는 요령의 대상
서울 청계로 6가 7가
그 소외양간만한 공장에서
70년대 풀빵 몇개로
끼니를 때우거나
새벽에는 닭냄새 나는 생라면 씹어먹고 추운 길 나서야 했다
낡은 수동식 기계의 소음 가득한 곳
먼지 자욱한 곳
오로지 그것밖에 없는 청춘 죽이는 곳
거기서 나오면
세상은 긴급조치 9호의 찬바람에
휴지조각
< ... >
(‘민종덕’, 14권)
 
집에 갈 차비 30원으로 풀빵 30개를 사서 여섯 사람에게 나눠주어, 밤잠을 제대로 못자고 점심을 굶은 채 일하던 그들이 한 시간 반쯤 더 견딜 수 있게 해준 전태일. 어머니가 점심으로 싸준 찐 밀가루빵을 ‘시다’들이 안 보는 데서 숨어 먹거나 그럴 수 없을 땐 남에게 주어버렸다는 청년(조영래, 앞의 책, 121쪽). 그 전태일 열사의 마음이 바로 풀빵의 힘이다.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시절을 겪었고 한 푼이라도 벌게 ‘풀빵 봉투’라도 붙이라고 말하던 시절은 지나갔지만, 이 땅의 보통사람들에게 풀빵의 기억은 아마도 각별할 것이다. 이제 그들의 후세대들이 다양하게 진화한 ‘풀빵의 후세대’들을 간식으로 만나 그들 시대 풀빵의 추억을 쌓아가겠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이 한 가지 있다. 전태일 열사의 풀빵이 가졌던 힘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날이 추워지면 여기저기서 붕어빵 나눔에 대한 미담이 들려온다. 평상시에 붕어빵을 늘 넉넉히 구워 길거리의 배고프고 돈 없는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집어먹을 수 있게 해주는 붕어빵 장수도 있고, 수십 년간 붕어빵을 팔면서 모은 돈으로 자신보다도 어려운 처지의 이웃을 꾸준히 돕는 이들도 있다. 나누고 베푸는 그 이름 없는 아주머니, 아저씨들 옆에는 또 한편, 해직을 당하고 새로운 각오로 붕어빵 장사에 도전하는 어떤 가장들도 있다. 나누어주는 마음, 가족을 책임지는 그들의 마음이 21세기에도 계속되는 붕어빵, 풀빵의 힘이리라.
 
풀빵을 팔아 모은 돈으로 15년째 이웃돕기 성금품을 기탁해 유명해진 '풀빵 아줌마' 이문희씨. 사진/뉴시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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