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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칼럼)검찰이 여전히 미덥지 않은 이유
2017-10-12 06:00:00 2017-10-12 09:07:32
“그거 각하했다. 국정원 문건과 동일한 양식이 아니다. 국정원 측도 자기들 문건이 아니라고 진술했다. 제일 중요한 건 감정을 한 건데, 그 결과 본건 문건은 국정원에서 작성된 문건이라고 볼 수 없어서 각하 처분했다. 문건이 아니라는 거니까.”
 
지난 2013년 10월7일 이른바 ‘박원순 제압 문건’을 수사한 이진한 서울중앙지검 2차장은 수사결과를 이렇게 설명했다. 예상은 됐지만 막상 나온 결과는 더 민망했다.
 
문건은 같은 해 5월15일 진선미 당시 민주당 의원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 국정원을 비롯한 정부 권력기관과 당시 여당 시의원, 경제단체, 보수시민단체, 논객 등을 가용 인력과 방법을 총동원해 박 시장을 전면적으로 제압해야 한다는 것이 내용이었다. 말이 ‘제압’이지 ‘박 시장 죽이기’였다. 문건은 2011년 11월24일 국정원 2차장 산하 국익전략실에서 생산됐다.
 
민주당은 원 전 원장과 이종명 전 국정원 3차장, 민병주 전 국정원 심리정보국장 등 지휘라인 4명과 문건 작성자, 보고라인 등 총 9명을 공직선거법과 국정원법 위반 등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검찰은 일주일쯤 뒤 수사에 착수했다. 수사는 서울중앙지검 공공형사수사부가 맡았다. 부장이 ‘면도날’이라는 별명을 가진 박형철 현 청와대 반부패비서관이다. 당시 박 부장검사는 특별수사팀 부팀장으로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을 수사하고 있었다. 팀장은 윤석열 현 서울중앙지검장이었다. 두 사람 모두 워낙 수사를 잘하는데다가 좌고우면하지 않는 성격이어서 수사결과가 주목됐다.
 
그러나 수사는 영 지지부진했다. 법무부와 검찰 수사지휘라인은 피의자 신분인 국정원 직원들의 처리를 두고 특별수사팀을 흔들고 있었다. 수사 대상인 국정원 직원들은 검찰 수사에 전혀 협조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수사결과이니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아예 처음부터 결론을 정해 놓고 짜 맞췄다는 인상이 강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국정원이 아니라니까 아닌 것이다”는 이 차장의 설명은 지금 떠올려 봐도 낯이 뜨겁다. 나중에 일어난 일이지만 사건을 수사한 윤 팀장과 박 부팀장은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에게 항명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고 좌천돼 박근혜 정부 기간 동안 수사부서에서 배제됐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바로 그맘때, ‘박원순 제압 문건’에 대한 수사가 재개됐다. 이번에는 아예 국정원 적폐청산 TF가 내부 자료를 제시하고 수사를 의뢰했다. 제시된 문건 만으로도 ‘박원순 제압 문건’의 존재가 확인됐다. 4년 전 검찰이 내린 결론과 정 반대다. 자신들은 부정하지만, 권력에 굴종한 시녀의 민낯이 드러난 것이다.
 
빼도 박도 못하게 된 검찰은 전방위적으로 수사에 속도를 내고 있다. 최초 수사 당시 혐의가 없다던 민 전 단장은 구속 기소됐다. 지시자인 원 전 원장도 구속기소를 눈앞에 두고 있다. 권력에 빌붙어 ‘애국’하던 돌격대들은 와해되고 있다.
 
세상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검찰의 태도는 과연 상전벽해에 가깝다. ‘박 시장 문건’ 사건 뿐만 아니라 진행 중인 모든 적폐 수사에서 그렇다. 적폐로, 청산의 대상이면서 청산의 칼로 나선 검찰은 이번 수사에서 과거와는 분명 다른 결론을 낼 것이다. 그 결론이 또 다시 권력에 바치는 제물이 될 지, 그나마 적폐로서의 오명을 스스로 씻는 것일지는 온전히 그들의 의지에 달렸다. 이것이 검찰이 여전히 미덥지 않은 이유다.
 
최기철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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