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기자
전국법관·대법원장 힘겨루기, 그 끝은…
역대 사법파동 '집단사퇴'로 발발·대법원장 퇴진으로 마무리
2017-07-20 19:17:08 2017-07-20 19:17:08
[뉴스토마토 최기철기자]현직 판사들이 포함된 사법개혁 단체가 양승태 대법원장을 직권남용 등 혐의로 고발된 데 이어 현직 부장판사가 양 대법원장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사직했다. 제6차 사법파동이 본격화 될 조짐이 보이고 있다.
 
인천지법 최한돈 부장판사(사법연수원 28기)는 20일 법원 내부게시판인 코트넷에 '판사직에서 물러나면서'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고 전국법관들의 사법권 남용 의혹 추가조사 요구를 거부한 양 대법원장을 공개 비판했다. 최 부장판사는 최근까지 전국법관대표회의 현안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지난 6월20일 법원행정처 차장에게 정보유출과 사생활 침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적극 협조하겠다며 추가 조사를 요구했다. 그러나 양 대법원장은 종전과 같은 이유로 거부했다. 이에 대해 최 부장판사는 글에서 “우리 사법부의 마지막 자정의지와 노력을 꺾어 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비판했다.
 
이에 앞서 전날에는 ‘사법부 제도개선을 추진하는 직원들의 모임’이 양 대법원장을 사법행정권 남용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며 직권남용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이 모임은 법원노조원들이 주축이 돼 있지만 현직 판사들 10여명도 함께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어떤 형태든 현직 판사가 대법원장을 형사고발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지금까지 총 5차에 걸친 사법파동이 있었다. 사법파동이란 소장파 판사들이 사법부의 구태나 악습, 사법권의 독립에 대한 침해에 항거해 집단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1971년, 1988년, 1993년, 2003년에 사법파동이 일어났으며, 최근에는 2009년 신영철 대법관이 서울중앙지법원장 시절 대법관 추천을 앞두고 ‘촛불재판’에 개입해 전국 법관들이 집단행동에 나섰다.
 
사법파동의 특징 중 하나는 판사들, 특히 소장파 평판사들이 중심이 돼 성명을 발표하는 등 집단행동에 나선다는 것이다. 평판사들의 집단행동에는 집단 사퇴가 포함된다.
 
1차 사법파동이 일어난 1971년에는 전국적으로 판사 153명이 사표를 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서울지검 공안부를 시켜 반공법 위반 사건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한 1개 재판부의 재판장과 배석판사 1명, 서기관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혐의는 반공법 위반 항소심 변호사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사태가 겉잡을 수 없이 커지자 박 대통령은 수사지시를 명하고, 민복기 대법원장이 직접 나서 겨우 수습했다.
 
사법부 수장인 대법원장이 물러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도 특징이다. 총 다섯 번 중 두 번의 사법파동이 대법원장 사퇴로 마무리 됐다.
 
1988년 2차 사법파동은 5공화국에서 법원행정처장을 역임한 김용철 대법관이 대법원장으로 취임하면서 발발했다. 전국 소장판사 335명이 ‘새로운 대법원 구성에 즈음한 우리들의 견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파장이 커졌다. 판사들은 김 대법원장의 사퇴와 법관 청와대 파견 금지, 정보기관원 법원 상주 반대 등을 주장했다. 결국 김 대법원장이 물러나서야 사태가 마무리됐다.
 
이후 5년만에 일어난 3차 사법파동도 김덕주 대법원장이 퇴진한 뒤에야 가라앉았다. 3차 사법파동은 사법부 내부에서의 진지한 반성에서 시작됐다는 것과 재판의 독립, 법관의 신분보장 쟁취가 주요 목표였다는 점에서 지금의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와 유사하다. 1993년 6월 서울민사지법 소장 판사 40여명은 구태 척결 등 사법부 개혁을 촉구하는 ‘사법부 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김 대법원장에게 제출했다. 역대 사법파동 보다 인원규모는 적었지만 폭발력은 더 컸다. 사법연수생과 변호사단체들이 소장 판사들을 공개 지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2003년 발생한 4차 사법파동에서는 판사들의 집단 사퇴나 대법원장의 퇴진이 없었다. 그러나 판사 160여명이 보수적 남성 법원장만 대법관이 되는 사법부 구태를 반대한다는 연판장에 서명하고, 금기시 됐던 대법관 인선 문제를 정면으로 지적하면서 최초의 여성 헌법재판관과 첫 여성 대법관이 나오는 등 사법부 인사개혁의 계기가 됐다.
 
2009년 5차 사법파동은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났다. 이명박 정부인 당시에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등 촛불집회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자연히 많은 시민들이 집시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이때 유력한 대법관 후보였던 신영철 서울중앙지법원장이 이른바 ‘촛불재판’을 맡은 단독판사들에게 메일 등을 보내 판결 선고를 독려하면서 문제가 됐다. 같은 시기 헌법재판소에는 ‘촛불재판’ 근거인 야간집회 금지 집시법 규정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이 제청돼 있었는데, 헌재의 결정을 기다린 뒤 그 결정에 따라 판결하려는 판사들이 많았다.
 
그러나 판사들의 태도는 이명박 정부에게 불리했다. 위헌심판 대상인 법률 규정에 위헌성이 많다는 것이 법조계 중론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력 대법관 후보로 지목된 법원장이 나서 ‘촛불재판’ 선고를 독려한 것은 임명권자인 이명박 대통령의 복심을 겨냥한 것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실제로 2009년 9월 헌재는 야간 옥외집회금지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신 법원장은 대법관으로 취임했고, 그 뒤 이용훈 대법원장이 진상조사를 실시한 뒤 ‘엄중경고’ 했지만 신 대법관은 임기를 모두 마쳤다.
 
역대 사법파동에 비춰볼 때 이번 전국법관대표회의와 양 대법원장의 힘겨루기의 결과를 두고는 법원 내부에서도 전망이 엇갈린다. 재경지역의 한 수석판사는 “양 대법원장의 리더십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며 “양 대법원장이 법원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더 많은 갈등과 혼란이 있기 전 용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같은 지역의 한 부장판사는 “사법부도 개혁 대상으로 이미 판사들 대부분이 수긍하는 분위기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리 없는 개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두달 조금 더 남은 임기를 채 마치지 못하고 퇴진하는 방향으로 간다면 또 다른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오는 24일 열리는 2차 전국법관회의에서는 양 대법원장이 거부한 사법부 블랙리스트 추가조사에 대한 논의가 이뤄질 예정이다.
 
 
1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로비에서 열린 신임 대법관 취임식에서 조재연 박정화 신임 대법관 너머로 묵념하는 양승태(왼쪽)대법원장이 보이고 있다. 사진/뉴시스
 
최기철 기자 lawch@etomato.com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지난 뉴스레터 보기 구독하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