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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2017년 헌정체제'를 위한 동아시아적 공화주의
2016-12-11 17:15:58 2016-12-12 07:16:42
임채원
서울대 국가리더십센터 선임연구원
박근혜 탄핵을 위한 1차 시민 대집회가 열렸던 10월29일 2만명의 시민이 광화문에 결집했다. 그로부터 불과 한 달 만인 12월3일에는 232만명의 시민들이 광화문광장을 비롯, 전국에서 ‘박근혜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시민 대집회에 참가했다.
 
시민적 공화주의(Civil republicanism)의 역사상 가장 찬연한 불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역사적 공화주의의 광휘가 발현되는 순간은 인류사에서도 희귀한 ‘위대한 절연(Great dislocation)’이다. 1399년에서 1402년까지 시민적 휴머니즘이 발화한 피렌체 도시 공화정의 찬란한 불꽃을 바라본 20세기 한스 바론(Hans Baron)은 중세에서 근대 시민사회로 넘어오는 위대한 이 순간을 과거와의 절연이라고 했다. 시민 대집회를 거치면서 시민들은 자신들이 하나의 공동체임을 자각하고 주변의 도시와는 다른 스스로의 자긍심으로 충만해졌다. 이때부터 이들은 시민적 덕성으로 새로운 도시 공화정을 만들었다. 이를 보고 자란 아이들은 한 세대를 지나지 않아 인류사에 위대한 르네상스 문예부흥을 꽃피웠다. 우리나라의 시민 대집회를 보고 자란 아이들 중에서도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제로, 라파엘로를 넘어서는 인류사의 위대한 지성이 나타나지 않을까.
 
12월9일 오후 4시8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찬성 234표, 반대 56표라는 압도적 표차로 국회를 통과했다. 같은 날 오후 7시3분, 탄핵결의안이 청와대에 접수되어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됐다. 이보다 앞선 5시57분, 같은 결의안이 헌법재판소에 전달되면서 탄핵심판 절차에 들어갔다. 시민의 광장 민주주의가 제도정치 속으로 들어가서 한국의 민주공화정은 시민적 공화주의의 제도화라는 새로운 정치적 시험대에 올랐다.

이제 시민들은 ‘2017년 헌정체제’를 묻기 시작했다. 87년 체제 30년을 넘어서는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정신과 제도적 틀을 묻는다. 지난 토요일 7차 시민대집회에서 104만명의 시민들이 모여 시민이 주도하는 시회개혁을 토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도정치권은 국무총리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를 온전히 시민의 것으로 지키기 위해 여·야·정 협의체를 구성하는 논의를 시작했다. 대통령 탄핵 이후 예상되는 조기 대선에서 여야 후보들은 87년 헌법을 넘어서는 헌법 개정(안)과 새로운 대한민국의 국가전략과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
 
제도정치권에서 정치인의 이해득실 때문에 간간히 논의되던 헌법 개정도 시민 광장에서 활발하게 토론될 것이다. 87년 개헌안처럼 몇몇 정치인들의 밀실에서 타협안이 아니라 시민적 공론을 거친 헌법안이 되어야 한다. 시민의 요구가 수용되는 여·야·정 협의체의 정치과정 속에서 새로운 헌정체제가 출범하게 된다.
 
‘2017년 헌정체제’의 개헌안은 지금까지 논의됐던 외국 헌법을 모방하는 비교헌법적인 수준을 벗어나길 기대한다. 그동안의 헌법 논의과정은 미국의 대통령 4년 중임제, 영국의 의원내각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등의 분권형 대통령제 등 해외 제도를 한국의 역사적 맥락과 상관없이 수입하려는 시도들이었다. 이는 우리 몸에 맞지 않는 외국의 옷을 걸치는 것과 같다. 우리 몸에 맞는 동아시아 맥락 속에서 새로운 헌정체제가 모색되어야 한다. 
 
동아시아적 헌정체제의 맥락에서 ‘2017년 헌정체제’는 대통령과 국회에서 선출되는 1명의 국무총리와 2명의 부총리로 동아시아적 혼합정체(East Asian Mixed Constitution)를 제도화하는 것이 새로운 헌정의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인 제도적 대안이다. 이는 국무총리가 경찰, 검찰 등 권력기관과 안전 등 국정관리를 총괄하고, 경제부총리가 경제부처를 담당하며, 사회부총리가 교육을 포함해 사회정책을 담당하는 국정운영 체제다. 총리와 부총리들은 국회의원으로 국회에서 선출되어야 한다. 대통령 1인에 권력이 집중되는 제왕적 대통령제를 혁신하는 권력 분점의 방식이 동아시아적인 지혜로 우리 역사 속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공화주의의 제도적 정신이 혼합정체(Mixed constitution)라고 한다면 동아시아적 헌정은 역사적으로 국왕과 재상 간의 권력분점을 통한 혼합정체를 이상적인 정치형태로 추구했다. 주나라의 주례(周禮)는 재상제의 원형인 총재제로, 국왕과 총재 간의 역할 분담을 제도화하였다.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도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 등에서 이 총재제를 통해 세습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고 재상 중심의 국정운영 모델을 제시했다. 세종은 집권 18년 이후 보다 완결적인 총재제를 운영하기 위해 의정부서사제를 도입했다. 조선 후기 비변사에 의해 국정이 파행적으로 운영되자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등이 국정개혁안으로 제시했던 것도 의정부서사제의 부활이었다.
 
동아시아적 혼합정체론은 1919년 9월 상해임시정부 임시헌법과 1948년 제헌헌법에서 국무총리와 국무회의 제도로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이 헌법의 초안자들이었던 조소앙과 유진오도 동아시아적 헌정에 친숙한 사람들로 재상제로서 총재재를 염두에 두고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정부수립 이후 이 제도가 제왕적 대통령들에 의해 사문화되고 대독 총리, 의전 총리로 전락했다.
 
12월9일부터 대한민국은 국무총리에 의한 권한대행체제를 중심으로 여·야·정 협의체를 구성해 국정운영을 하는 시험대에 올랐다. 이제 불가역적으로 ‘2017년 헌정체제’를 향해 대한민국은 가속페달을 밟았다. 동아시아적 헌정체제를 통해 국회의원과 총리가 중심이 된 협치가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국정운영의 기본 틀로 모색되길 희망한다.
 
임채원 서울대 국가리더십센터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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