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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그룹 투자계획, 발표만 있고 점검은 없다
정부, 이행결과 '나몰라라'…말뿐인 계획, 실제는 '규제철폐'
2015-09-02 07:00:00 2015-09-02 07:00:00
올 3월 전국경제인연합회는 30대 그룹 투자·고용계획을 발표하면서 대기업이 지난 2013년 이후 매년 투자계획을 과감히 늘려왔다고 밝혔다. 전경련에 따르면 30대 그룹의 투자규모는 2013년 116조8000억원에서, 올해 136조4000억원까지 늘었다.
 
문제는 이행률이다. 취재팀이 한 달여에 걸쳐 30대 그룹 상장 계열사 사업보고서와 공시자료 등을 근거로 실제 집행률을 집계한 결과, 최근 2년간 이들 그룹의 투자 이행률은 60%대 후반에 그쳤고, 이마저도 해마다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박근혜 정부는 규제개혁장관회의까지 열며 규제 철폐와 투자 활성화를 맞바꿨지만, 실상은 규제와 투자 모두 후퇴였다.
 
기업의 낮은 투자 이행률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정부 책임론이 제기된다. 정부는 MB 집권 시절인 2012년부터 매해 두 차례씩 재계와 간담회를 열고 투자 및 고용계획을 발표해왔지만, 정작 이행 점검 여부에 대해서는 기업의 경영에 관여할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방치하고 있다. 예산만 있고 결산은 없는 재벌 약속의 이면에는 무책임한 정부가 있었다.
 
산업정책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 출범 후 2년 반 동안 산업부와 재계가 가진 투자간담회는 총 5번이었다. 2013년 4월 이뤄진 첫 간담회에서 윤상직 산업부 장관과 만난 30대 그룹 사장단은 148조8000억원의 투자와 12만8000명의 고용을 약속하며 정부 눈치를 살폈다.
 
두 번째 만남은 같은 해 10월로, 당시 윤상직 장관은 30대 그룹의 투자 이행률 100% 달성을 위해 정부가 100여건의 경제활성화 관련 입법을 조속히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재계 주장을 수용키 위해 대선 공약인 경제민주화를 깨끗이 포기했다. 이듬해 1월에 열린 세 번째 간담회에서 삼성과 현대차, SK 등 주요 그룹은 투자계획 달성을 위한 규제완화와 노동시장 구조개혁, 환경규제 개선, 세제 혜택 등을 요구하며 실리를 챙겼다. 조건부 투자였다.
 
2014년 10월 열린 네 번째 간담회에서는 30대 그룹 대신 16개 기업만 참여해 하반기부터 13개 프로젝트에서 28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어 올해 2월에 열린 다섯번째 간담회에서는 16개 기업이 연내 34조4000억원 규모의 투자를 계획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부는 다섯번의 투자간담회를 열고서도 투자가 계획대로 이뤄졌는지는 확인조차 않고 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산업부가 재계의 투자 이행률과 관련해 발표한 것은 2013년 8월28일 '30대 그룹의 상반기 투자 이행률이 41.5%에 그쳤다'는 보도자료 1건뿐이었다. 이마저도 재계를 대변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 발표를 인용한 수준이었다.
 
자료/뉴스토마토
 
정부의 방치 속에 재계는 박근혜 정부 출범 첫 해에는 경제민주화를 의식해 투자계획을 부풀렸다가, 집권 2년차부터는 투자규모를 줄이는 모습까지 보였다. 2013년 산업부와 30대 그룹 사장단 투자간담회에서 재계가 밝힌 투자계획은 148조8000억원으로, 여기에는 투자기간이 2년 이상 걸리는 장기 프로젝트가 포함됐다는 점을 고려해도 전경련에서 발표한 당시 30대 그룹 투자규모(116조8000억원)보다 30조원이나 많다.
 
정부와 재계가 투자계획을 논의하는 유일한 공식창구인 투자간담회 규모도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점점 외형이 작아지고 있다. 투자간담회에 참석하는 기업 수를 보면, 박근혜 정부 2년차인 2014년 초까지만 해도 삼성전자와 현대차, LG, 포스코 등 30대 그룹이 이름을 올렸으나 지난해 10월부터는 참여 기업이 16개로 절반 정도 줄었다.
 
이들 16개 기업도 삼성전자와 삼성디스플레이, 현대차, SK에너지, SK종합화학, SK하이닉스 등 주요 그룹의 계열사들로, 그룹별로 따지면 삼성, 현대차, SK 등 9개 그룹에 불과하다. 반년 전까지 투자간담회에 참여한 30대 그룹 가운데 무려 21개 그룹이 불참한 셈이다.
 
반면 투자간담회에서 재계가 요구하는 투자활성화 수준은 경제민주화를 외쳤던 정부의 애초 방향과는 점점 반대로 간다. 2013년 재계는 공장 증설 및 연구소 확충을 위한 입지규제 완화와 투자세액 공제, 지주회사(증손회사) 지분취득 제한 규정 완화 등을 요구했다. 지난해에는 동반성장 지표 산정기준 개선, 수도권 입지규제 완화, 대규모 유통업체 영업·출점 규제 폐지, 임금피크제 의무화와 통상임금 정의 규정 입법화 등을 정부에 당부했다.
 
이에 대해 문동민 산업부 산업정책과장은 "계획 이행 여부를 점검할 계획도 없고, 우월한 지위에서 기업의 투자계획을 점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투자계획 발표라는 것도 공식적인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정부 스스로 위상과 권한을 부정하면서, 그간 정부가 재계를 압박해 대규모 투자계획을 이끌어냈다는 공치사도 어렵게 됐다. 앞으로도 정부가 '묻지마 투자 발표'를 막거나 점검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물론 검증 없는 정치적 쇼의 의도를 잘 아는 재계로서는 들러리 역할에만 충실하고 있다.
 
정부가 기업의 투자 이행률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서 투자 확대에 따른 경제적 낙수효과는 기대키 어렵다는 반론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무엇보다 국내외 투자조차 구분되지 않아 투자에 따른 파급효과를 따지는 게 무의미하다는 지적이다. 오히려 투자간담회가 재계 요구사항만 받아들이는 자리로 변질됐다는 질타까지 나온다. 위평량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은 "재벌 대기업 중심의 규제완화만 집행되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지난 2월11일 윤상직 산업통상부자원부 장관과 16개 주요 기업 사장단이 서울 중구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투자간담회 직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최병호·김동훈 기자 choib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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