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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예술극장에 시스템 만들러 왔다"
예술감독 부임 2년차…'동시대 아시아 예술의 허브' 개념 풀어내는 중
"'아시아 최고의 예술작업을 볼 수 있다'는 신뢰 쌓아야"
2015-07-07 06:00:00 2015-07-11 17:58:48
그간 오해를 참 많이 받았다. 남들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2000년대 초반부터 동시대(contemporary)라는 키워드를 끈질기게 부여잡고 온 대가다. 제롬 벨, 리미니 프로토콜, 로메오 카스텔루치 등 세계적인 예술가들을 발로 뛰어가며 국내에 소개했지만 '외국 문물을 수입해 한국 공연계에 이식하려는 것 아니냐'는 오해, '외국의 동시대가 과연 한국의 동시대인가' 라는 질문 등이 끊이지 않고 따라 붙었다. 다행히 예술계 내부보다 관객이 먼저 호응해 버텨올 수 있었다. '모다페(MODAFE)'와 '페스티벌 봄' 등의 예술축제를 통해 국내 공연예술계에 혜성처럼 등장해 연타석 홈런을 날렸던 김성희 공연예술감독 이야기다.
 
톡톡 튀는 행보를 보였던 이 독립기획자는 수년 간 앞장 서서 이끌던 축제 '페스티벌 봄'을 후배 기획자에게 넘겨주고 지난 2013년 공공기관에 입성하면서 또 한 번 공연계의 이목을 끌었다. 김성희 감독은 현재 광주에 위치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예술극장의 예술감독으로 재직 중이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그간 담금질한 결과를 공개할 날이 목전으로 다가왔다. 오는 9월 아시아예술극장 개관 축제가 바로 그 시작이다. 개관 축제에 참가하는 아시아 작가들의 워크숍을 위해 서울 가톨릭청년회관 다리에 방문한 김 감독을 3일 만나 개관축제와 동시대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김성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예술극장 예술감독
 
'모다페', '페스티벌 봄' 등의 축제를 개최하며 컨템포러리(contemporary)라는 키워드를 오랫동안 붙잡고 왔다.
 
동시대가 열쇠인데 덮고 갈 수는 없지 않나. 우선 동시대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근대를 압축적으로 경험했다. 경제도 그렇지만 문화도 그랬다. 서구에서 19, 20세기에 있던 여러가지 '이즘(ism)'들이 80년대에서 2000년대 사이에 동시에 들어온 거다. 남들이 한 세기에 걸쳐서 소화한 것들을 압축적으로 받아들인 거다. 그러다보니 왜곡 됐다.
 
서구 동시대 예술사에서 항상 새로운 것이 나올 때는 그 전에 있던 '아버지'를 죽이고 나오는 것이어서 그 이전과 이후의 맥락들이 있다. 맥락을 보면 어떤 스타일이 나온 이유가 설명된다. 그런데 그런 맥락과 근원적 질문은 건너뛰고 스타일만 따라하려는 경향이 팽배하다. 스타일 따라하기를 잠시 접어놓고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잠시 성찰해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스타일만 따라할 게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오늘 아시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하는 시간이 지금은 필요한 것 같다.
 
초반기 예술계 내부에서 갈등을 숱하게 겪었을 듯하다. 지금은 그래도 인식이 좀 바뀐 편인가.
 
초반에는 스스로도 기존에 만들어진 예술계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기보다는 그 틀 안에서 뭔가를 해결하고 그 안에서 방법들을 찾으려고 했는데 사실은 그때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다. 생각을 바꾸고 시스템과 형식을 바꾸자고 설득하는 일이 어느 순간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신념이 있으니까 '맞는데 왜 안될까'를 생각하면서 갔다. 오히려 장르도 더 다원적으로 가고, 그러면서 관객과 만나는 접속면도 넓혔다. 기존의 연극과 무용을 넘어서면서 미술, 디자인, 인문학, 미디어 등 굉장히 다른 분야들과 접촉했다. 이런 쪽 사람들을 설득하는 게 훨씬 쉽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 들었다.
 
뭔가 중첩적인 것들이 만들어지면서 맨 처음에는 안 늘어날 것 같았던 관객이 어느 순간 쑥 커있더라. 2007년 스프링 웨이브 페스티벌('페스티벌 봄'의 전신)을 시작했는데 2008년의 경우 200석 가까운 극장을 2회도 못 채우기도 했었다. 한 300명 정도로 시작했는데 내가 그만 두고 나온 2012년 '페스티벌 봄' 관객수가 1만명을 상회할 정도까지 올라갔다. 물론 그렇게 큰 수는 아니지만 작은 움직임에서 시작된 페스티벌이 5년간 이뤄낸 성과로 보면 긍정적인 발전이다.
 
무용과 출신이다. 예술경영으로 진로를 바꾸게 된 계기는.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한국현대무용단에 있다가 뉴욕대로 유학을 갔다. 원래 무용 실기 학교를 들어가려고 갔는데 거기서 충격을 받았다. 유학을 갔더니 무용이라는 개념 자체가 너무 다르더라. 내가 알고 있는 무용세상의 전부는 그곳에서는 이미 지나간, 요만한 조각에 불과했다. 거기서 잘한다는 것의 의미는 테크닉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잘하는 것이었다.
 
'내가 왜 이렇게 잘못 알고 있었는가'하는 좌절감에 방황했고, 또 동시에 '지금 내가 변할 수 있는가, 동시대에 접속이 되겠는가'를 굉장히 고민했다.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와중에 이걸 고치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나 이후에 다른 사람들이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무용 안에 기획, 극장 경영, 큐레이팅 등 굉장히 세분화된 전문분야가 있었는데 이런 분야를 공부해서 한다면 지금까지 내가 한 경험들이 없어지지 않고 자산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용 실기를 다 그만두고 뉴욕대 예술경영학과 들어가는 준비를 그곳에서 했다(웃음).
 
현재 아시아예술극장 예술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아시아예술극장의 키워드로 '동시대 아시아 예술의 허브'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개념을 어떻게 풀어나가고 있는지.
 
개인적으로 큰 공부가 되고 있다. 솔직히 얘기하면 한국에서 일 할 때 가장 큰 문제는 세계와 한국의 공연예술 현장 간 시간차가 너무도 크다는 점이었다. 이 시간을 어떻게 같은 시간으로 만드냐가 나한테는 가장 큰 숙제였다. 일단은 동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똑같은 걸 공유해야 그 다음 얘기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한국에서 젊은 작가들을 만들어내는 것에 한동안 몰두했었다. 만나는 해외 전문가들이 '문화권력이 비서구로 간다, 아시아가 중요하다'면서 아시아 동시대 예술작품에 관심을 내비췄건만 당시만 해도 하나도 없는 것에 대해 나 스스로 놀랐기 때문이다. 사실 페스티벌 봄에 몸 담던 마지막 2~3년에 이미 거기서 아시아에 대한 얘기들이 나오기 시작했었다. 여기에 와서 아시아에 대한 리서치, 아시아에 대한 생각을 만들어내는 일을 계속해서 하고 있다.
 
아시아예술극장의 단계별 목표가 궁금하다.
 
단계적으로는 없다(웃음). 지금 세팅한 게 굉장히 세심하게 고안된 거다. 미래에 주어지는 예산의 범위, 그 안에서 '창제작 센터를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 동시대 예술의 허브'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 세팅된 상태가 3년, 5년, 7년 지속되는 게 전제돼야 한다.
 
정부가 인내심을 버린다면 사실 문제가 된다. 내가 여기 시스템을 세팅한 것이고, 내가 나가도 돌아가야 시스템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시스템이라 하더라도 1년 해 놓고 성공한 사례는 없다. '아시아에서 특정 시기가 되면 최고의 작업을 만나볼 수 있는 축제가 열린다'는 게 약속이 돼야 한다.
 
내년 5월까지가 임기다. 아시아예술극장을 떠나게 되면 김성희 큐레이터로서 어떤 활동을 벌일 예정인지.
 
지금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아시아의 젊은 작가들을 찾는 작업을 계속 할 것이다. 국가 안에서 뭔가를 생각하는 시간은 이미 지난 것 같다. 그것보다는 지역(region), 그러니까 동아시아나 아시아 같은 영역이 우리가 생각해야 할 반경인 것 같다. 확실한 건 계속해서 젊은 사람들과 새로운 것을 발굴하고 그들을 지원하고 만들어가는 일을 한다는 것인데 그게 학교에서 이뤄질 수도 있겠다. 어쨌든 될 수 있으면 살면서 계속 독립기획자로 있고 싶다.
 
김나볏 기자 freenb@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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