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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승자에 가려진 패자들의 이야기
'역적전' | 곽재식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 펴냄
2015-03-13 22:38:16 2015-03-13 22:38:16
[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취미가 글쓰기인 한 직장인이 있습니다. 취미생활이라지만 꾸준히 소설을 발표한 지 어느덧 10년입니다.
 
2005년 환상문학웹진 거울 24호에 '달과 육백만 달러'라는 소설을 게재한 이후 필진으로도 꾸준히 활동 중입니다. 그동안 발표한 소설로는 '모살기',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사기꾼의 심장은 천천히 뛴다' 등이 있습니다.
 
바로 곽재식 작가 이야기인데요. 1982년생인 이 작가가 지난해 12월 낸 4번째 소설집, '역적전'을 뒤늦게 소개할까 합니다.
 
곽재식 작가는 지난 2002년 언론에 소개된 일도 있습니다. 카이스트를 무려 2년 반 만에 졸업하는 기염을 토했기 때문입니다.
 
공학도인 곽씨는 현재 화학관련 회사에서 일하면서 주경야'필' 중입니다. 시간 날 때마다 단편소설을 쓰고, 또 장편으로 묶어내기도 하면서 독자와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있지요.
 
작가 말로는 술 마시러 다니는 것도, 카메라 들고 출사를 다니는 것도, 낚시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서 이렇게 꾸준히 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하네요.
 
아예 작가로 전업해볼까 하는 생각도 안 해 본 것은 아니랍니다. 하지만 지금은 "큰 욕심 없이 글을 쓰기 시작한 덕에 이제껏 오랫동안 글을 쓸 수 있었다"며 스스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도서정가제의 여파로 출판 시장이 얼어붙은 시기에 책이 나왔기 때문일까요. 새 책 '역적전'은 아쉽게도 큰 주목을 끌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근데 읽어 보니 그냥 묻히기엔 좀 아까운 책입니다. 아무리 취미생활이라지만 이 작가는 나름대로 프로의 향기를 풍기고 있거든요. 심지어 열성 팬도 있어 소소한 팬미팅도 치른 바도 있답니다.
 
특히 이 작가는 생생한 인물묘사에 강점이 있어 보입니다. 장면이 마치 눈앞에 그림이 그려지듯 펼쳐내는 재주가 있지요.
 
이 같은 장점은 이미 텔레비전 PD의 눈에 띄기도 했습니다. 단편소설 '판소리 수궁가 중에서 토끼의 아리아: 맥주의 마음'의 경우 MBC베스트극장에서 '토끼의 아리아'라는 제목 아래 극화되기도 했습니다.
 
비록 소설의 영상화가 단 한 차례에 그친 점을 곽 작가는 무척 아쉬워 하고 있지만, 뭐 기회는 또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사 같은 곳에서도 가끔씩 연락이 온다고 하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번 소설 '역적전'은 요즘 트렌드에 맞는 '퓨전사극' 스타일의 소설이거든요.
 
◇패자의 역사를 그리다
 
역사기록을 바탕으로 한 픽션 '역적전'은 '공부 좀 해 본' 작가가 쓴 작품이라는 티가 납니다.
 
작품은 다라국 지역의 가야 유적이 고구려 침입의 영향으로 직접 이주한 가락국 사람들의 영향을 받은 특성을 보인다는 고고학 연구 결과, 그리고 '일본서기'에도 나오는 궁월군이 많은 백제 사람들을 이끌고 왜국으로 가려고 했다가 신라 사람들이 막는 바람에 가야에 머물러 있게 됐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하지요.
 
작가는 2011년부터 드문드문 써오고 있는 광개토왕 무렵을 다룬 여러 편의 단편, 중편에 이어서 이 작품을 썼다고 하네요. 문체를 보면 '금오신화'나 '옥루몽' 같은 조선 시대 소설과 비슷한 분위기도 납니다.
 
구조는 단순한 편입니다. 다라국의 현명한 판결자 하한기와 그의 하수 적화랑이 스스로 역적임을 고하는 사가노와 출랑랑에게 죄를 따져 묻는다는 게 이야기의 틀거리이지요.
 
하한기와 적화랑은 즉각 처결해달라는 용원당 수하들의 청을 뒤로 하고, 말 못 할 비밀이 있는 듯 입을 꽉 다문 두 죄인을 오밤 중에 찾아가 이야기를 듣습니다. 죄인들을 따로 묶어 두고 먼저 사가노에게, 그 다음은 출랑랑에게 자초지종을 묻습니다.
 
이들의 이야기 속에는 고구려의 영웅 광개토와 고구려의 침입으로 고난을 겪은 남부 3국의 수난사, 그리고 개인의 수난사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승자의 뒤에 숨겨진 패자들의 처연한 현실이 드러납니다. 고구려와 싸우려는 백제를 떠나 왜국 섬으로 향하는 백제 부자들이 배를 타고 가던 중 신라의 배를 만나 공격을 받은 이야기는 백제 부자의 종 사가노의 입을 통해 전해집니다.
 
가락국 명문가 집안이 고구려와 백제 간 전쟁에 백제 편으로 차출되면서 몰락해가는 이야기는 가락국 출씨 집안의 딸 출랑랑의 몫입니다. 전쟁은 부자와 가난한 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를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게 합니다.
 
처음에는 서로 뺏고 빼앗기고, 짓밟고 짓밟히는 권력의 구도가 명확하게 갈리는 듯하지만 결국 절대권력을 제외한 나머지 백성들은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상황에 직면하게 되지요.
 
비록 승자가 아닌 패자들의 무용담이긴 하지만 주인공들은 소영웅이라 불릴 만합니다. 비루한 종 노릇을 하지만 회를 잘 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인간미 넘치는 사가노,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다 실패하지만 걸출한 칼 솜씨로 세상을 호령하는 여장부 출랑랑의 모습은 묘한 쾌감을 줍니다.
 
용봉도, 용문도, 봉문도 등 칼에 얽힌 이야기는 모험소설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데 일조하며 흥미를 돋웁니다. 각자 나름대로 피폐한 삶을 살다가 무덤 속에서 만나 함께 부활(?)했다는 설정도 상징적이네요.
 
◇이 책의 가치는?
 
곽재식 작가는 소위 말해 등단한 작가, 평론가의 입에 오르내리는 작가는 아닙니다. 그래서일까요. 장점과 단점이 분명합니다만 장점이 앞서는 작가라고 감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역적전'의 경우를 예로 들어볼까요. 문장의 호흡은 다소 빠른 편입니다. 잘 읽히는 문장이지만 엄청난 비유나 묘사를 바탕으로 한 문장은 아니지요. 어쩌면 고전소설의 형식을 차용했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결말이 약간 허무하기도 하고요. 대신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모았다가 잘 구성해 펼쳐내는 재주가 있어 보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캐릭터가 생생하다는 것도 강점입니다.
 
여기서 잠시 작가의 말을 직접 들어볼까요. 생생한 캐릭터를 만든 비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인물을 생동감 있게 만드려면 그 인물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삶을 사는지 잘 상상해서 그럴 듯하게 그려낼 수 있어야 하는데 영웅적인 인물, 멋있는 인물을 만들어내려고 하면 상상하는 데 한계가 있어요. 제가 영웅적이고 멋있는 인물이 아니거든요(웃음). 이렇게 하면 진짜 영웅적으로 보일꺼야 하고 써도 돌아보면 되게 유치해보이고… 광개토 대왕처럼 싸울 땐 어떻게 할까 아무리 궁리해봐도 잘 안 풀리더라고요. 그래서 제 수준에서 다시 생각했습니다. '엄청나게 강한 나라가 갑자기 쳐들어와서 싸워야 한다, 예비군 기간도 다 지났지만 군복 다시 차려 입고 나가야 한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 하는 식으로요. '여기서 이렇게 하면 살기 좋은 데로 도피할 수 있단다'라고 누가 부추긴다면… '만약에 사람의 도덕심이 조금만 타락하면 얼마나 거기에 혹하기 쉬울까' 하는 생각을 했죠. 그런 생각은 상상하기가 더 쉬워요."
 
이처럼 솔직한 면모를 지닌 곽 작가는 쉽게 공감하기 쉬운 인물을 내세우고, 풍부한 사료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짜내고, 집중력있게 구성해내 대중에게 잘 읽히는 소설을 만들어냈습니다.
 
또 패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승자와 패자 모두를 바라보고, 고구려 이야기가 아니라 공격 받은 나라의 역적 이야기를 통해 당대의 정세를 바라보게 한다는 것도 이 책의 매력 중 하나입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색깔이 강하다는 점이 반갑네요. 화려한 문학상을 거머쥔 소설들과는 조금 다른, 개성 만점의 소설을 읽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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