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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구가 심오해졌다
2014-10-24 19:08:30 2014-10-24 19:08:30
◇설경구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뉴스토마토 함상범기자] 영화 <소원> 인터뷰 때 만난 적이 있었다. 소탈하면서도 자기 주장이 강한 성격이다. 편안한 것을 좋아한다. 그러다보니 인터뷰 때도 기자들과 수다 떨듯이 편하게 얘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게 되면 기자는 기사화 할때 뭘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는 패닉에 빠지기도 한다. 배우 설경구는 인간적으로는 좋지만 취재원으로는 어려운 남자였다.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설경구를 찾았다. '다를지도 모르겠다'란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영화 <나의 독재자>를 보면 알게 된다. 김일성 대역을 맡은 무명 배우 성근을 연기한 설경구는 지금까지의 클리셰를 완전히 뒤덮는 새로운 연기를 펼치기 때문이다.
 
많이 예민했다고 들었다. 직접적으로 "감독에게 심하게 상처를 줬다"는 말도 했다. 이해가 됐다. "얼마나 고됐을까?"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5시간의 특수분장에 김일성을 완벽히 연기하는 배우가 된다는 것에 대한 압박감, 교묘하게 흐르는 부성애까지, 그가 감당해야할 몫이 너무도 많았다.
 
그런 그를 23일 저녁 서울 삼청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여전히 수더분한 옷차림과 편안한 얼굴로 기자를 대했다. 그리고 김일성 대역이었던 성근에 대해 심오한 이야기를 나눴다.
 
◇설경구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안 빠진거냐, 못 빠져나온 거냐, 나도 모른다"
 
취재진끼리 의견이 분분했다. "성근은 김일성에서 못 빠져나온 거냐, 안 빠져나온거냐"라는 것이다. 1972년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준비된 '대통령과 가짜 김일성의 리허설' 프로젝트에서 김일성을 맡는다.
 
긴 무명시절을 견디던 중 찾아온 연극 '리어왕'의 큰 배역을 받은 성근은 아들과 그 친구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다. 그리고 주어진 또 다른 찬스가 김일성이다. 아들 앞에서 완벽한 연기를 펼치고 싶은 그는 살을 찌우고 북한의 사상을 체화하고, 혹을 만든다. 하지만 독재자가 유신을 선포하면서 그가 설 무대는 사라진다. 그리고 22년 간을 김일성으로 살아간다. 과연 성근은 김일성이란 역할에서 못 빠져나온 것인가, 아니면 일부로 빠져나오지 않은 것인가.
 
"나도 모르겠어."
 
설경구가 한 말이다. 연기를 할 때는 안 빠져나온 것으로 생각을 했다는데 잘 모르겠다고 한다. 그리고 성근 역할을 준비하면서 혹은 연기하면서 느꼈던 생각을 고스란히 전했다.
 
"아들 눈을 못 봐요. 태식(박해일 분)이 눈을 절대 보지 않아. 계속 피해요. 그 깊은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요. 아마 김일성은 성근이 살아갈 유일한 생명수였다고 생각해요. 마지막까지도 연극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태식이한테 '위대한 연극 한다고 하지 않았어'나 발톱을 깎는 장면에서 안 빠져나왔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오 계장(윤제문 분)을 만나는 장면에서 전혀 당황하지 않아요.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성근이는. 계속 아픈 사람인데, 여태까지 산 건 그 끝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봤어요."
 
이보다도 말이 길었다. 약 7분여를 혼자서 쭉 이었다. 머릿 속에 장면을 떠올리면서 그의 말을 대입해봤다. 심오함이 느껴졌다. 극의 하이라이트인 대통령과의 리허설이 끝난 뒤 성근은 22년 전 아들에게 보여주지 못했던 '리어왕'에서 그가 맡았던 역할을 다시 연기한다. 22년 전의 아들에게 망신을 줬던 그 순간을 끝까지 간직해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관객과의 기 싸움에서 진 성근이에요. 근데 대통령 앞이야 지지 않으려고 힘을 꽉꽉 줘요. 그러면서 '리어왕'까지 이어지는 거예요. 그전까지 태식의 눈을 못 쳐다보던 성근이가 CCTV를 보면서 연기를 해요. 그게 유일하게 아들의 눈을 쳐다보는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이 말이 끝나자 기자의 입에서 '아!'라는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흐뭇한 표정으로 "심오하지?"라고 부드럽게 말을 연 설경구였다. 이 역할을 연기하기 위해서 8개월 동안 자신을 털어내는 과정이 있었다.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서 성근을 연기했다. 혹시 후유증은 없었냐고 물었다.
 
"그런 거 없어요. 박하사탕 때 좀 그러긴 했는데, 싹 빠져나왔어요. 물론 잔상은 있겠지. 기자들이 막 '메소드 연기'한다고 하는데, 나 그런 사람 아니에요."
 
이 말과 함께 사람 좋은 웃음을 던지는 설경구. 앞서 거론했듯이 이번 작품에서는 클리셰가 보이지 않는다. <공공의 적>, <실미도>는 물론 <소원>에서도 보였던 특유의 습관이 <나의 독재자>에서는 없다.
 
설경구는 "이해준 감독한테 감사해야죠. 이 책을 내게 준 건 정말 고마워 해야돼요. 그런 사람을 그렇게 상처를 줬으니, 내가 죽일 놈이지. 하하"라고 웃어보였다. 자신이 이뤄낸 공을 자연스럽게 감독에게 돌리는 설경구는 좋은 배우이기 전에 좋은 사람 같았다.
 
◇설경구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박해일이 아니었으면 이 영화 못했어"
 
영화는 설경구의 원맨쇼다. 마치 모노드라마를 보는 듯 자유자재로 스크린 안을 휘젓는다. 그 옆에는 아들 태식 역의 박해일이 있었다.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는 아버지와 아들이다.
 
성근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판타지라면, 태식은 철저하게 현실적으로 만들어진 인물이다. 박해일은 스포트라이트를 철저히 설경구에게 옮긴다. 크게 오버하지 않고 절제된 연기를 펼친다. 박해일이 아니었더라면 '스크린의 독재자' 설경구도 없었다는 게 평단의 반응이다.
 
설경구도 잘 알고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박해일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박해일이 없었으면 못 했을 영화예요."
 
꽤나 확신에 찬 발언이었다. 못을 박는 느낌이었다. 박해일이 이름값에 맞게 연기를 잘하기는 했지만, 그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말한 이유를 이어나갔다.
 
"리액션은 기본적으로 잘했고, 특수분장에 대한 이해도가 국내에서 제일 높을거예요. 특수분장을 하면 다 제 위주로 찍어요. 왜냐면 분장이 떨어져나가면 바로 촬영 취소하거든. 분장이 떨어지기 전에 다 찍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해일이는 같이 나와서 대사도 치고 어깨도 빌려주고 그래야돼요. 근데 그 때 내 상태를 정확히 알고, 내가 어떤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도 정확히 알고 이해를 해줬어요. 나한테 다 맞추니까 자기 리듬이 깨질 거 아냐. 그 리듬 안 깨질려고 더 힘들었을 거예요. 연기력은 뭐, 아주 스펀지 같은 배우예요. 술술 받쳐주면서 쥐었다가 놨다가, 아주 잘해요."
 
혹자가 그랬다.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의 조합"이라고 했다. 아주 적절하다면서 박수를 쳤다. "조화가 아주 잘 맞았나봐요"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서 만족스러운 미소가 흘렀다.
 
오는 30일 개봉하는 <나의 독재자>의 설경구에 대해 누군가는 경이롭다고 하고 '인생 연기'라고도 한다. 그만큼 설경구의 퍼포먼스는 훌륭하다. 이 연기를 스크린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도 어쩌면 행운이라고 하고 싶다. 그 행운을 만끽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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