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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만 학문?..소수 이권 위해 다수 희생하는 꼴”
‘모든 언어는 평등’ 주장 펴는 구연상 교수
2014-10-24 16:28:20 2014-10-24 16:28:20
[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국문학자도 아니고 한글운동가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말’이라는 단어를 늘상 입에 달고 산다. 최근 <우리말은 병신 말입니까(채륜 펴냄)>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의 책도 냈다. 구연상(48·사진) 숙명여자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 얘기다.
 
(사진=세계문자심포지아2014 조직위원회)
철학 전공인 구 교수가 이렇게 우리말 쓰기에 열을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23일 서울 광화문에서 구 교수를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어봤다.
 
학자인 구씨의 문제의식은 다름 아닌 학문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말과 글은 삶과 직결된 인문학적 문제인데, 우리말의 설 자리가 협소해지면서 학문의 생태계에도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시각이다.
 
구 교수가 보기에 생활어, 문학어, 학문어 중 특히 학문어가 문제다. ‘우리말을 병신 말(온전치 못한 말)로 만들고 있는’ 주범으로는 중앙일보, 조선일보 등 언론사의 대학평가를 꼽았다. 구 교수는 “대학평가가 영어로 강의하기, 영어로 논문쓰기를 요구하고 있다”며 “엄청난 혼란을 빚으면서도 영어, 일본어, 중국어를 해야 한다고 종용하는데 이것은 실상 아무런 기반도 없는 정치적 발언”이라고 지적했다.
 
소수의 이권을 위해 다수가 희생하고 있다는 게 구 교수의 주장이다. “영어로 강의하고, 들을 수 있는 수준은 학교 전체의 10% 정도예요. 외국에 다녀온 사람들이죠. 또 대학이 영어 배우는 곳은 아니지 않습니까? 영어로 쓰인 지식을 독해하는 ‘죽은 지식’을 배우고 있는 형국이고, 이 때문에 학문의 위기가 초래되고 있어요.” 구 교수는 “국제화가 영어화는 아니지 않냐”고 거듭 되물었다.
 
구 교수가 현실을 뼈저리게 체감한 것은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을 통해서다. 2001년 창립된 이 모임은 초기 150명으로 출발했다. 2010년까지 활발히 진행됐지만 그 이후 국제화가 노골적으로 흘러가면서 모임은 활력을 잃었다. 참여하던 학자들은 교수임용을 위한 외국어 논문을 쓰느라 바빠졌다. 모임에 나오는 사람의 숫자는 10년 만에 60~70% 정도 감소했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말로 학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제도적으로 막혀버린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2004년 의학과 물리학 분야 저널의 SCI 등재를 기점으로 학문의 중심이 우리말에서 영어로 넘어갔다. 김영삼 정권 때 기획된 BK21사업도 이 같은 흐름을 부추겼다. 구 교수는 "해외학술 투고 등을 조건으로 1년 3000억원을 지원한다는 데 이를 마다할 대학이 어디 있겠냐"며 “한국어로 쓰여진 논문에는 인용지수인 임팩트 팩터(impact factor)를 주지 않는 제도적 탄압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구 교수는 해외의 학문 선진국 사례를 들며 우리말의 미래를 가늠해보기를 권했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아이슬란드는 모국어 잃어가는 중이에요. 영어에 대한 언어장벽이 낮기 때문이죠. 네덜란드는 모국어로 쓸 경우 지원금까지 줄 정도예요.” 그렇다면 요즘 잘 나가는 미국, 일본은 어떨까? “미국은 1987년까지 (학문에서) 최고의 카피국가였죠. 지금은 지적재산권을 내세우면서 자기들의 학문적 성과를 함부로 번역 못 하게 해요. 일본이요? 학문에서 언어의 자유를 주죠. 대학에서 논문을 발표할 때 영어로 쓸 수 있지만 SCI저널에 실린 것과 교내 것의 논문 가격이 같아요. 즉, 필요에 따라 언어를 골라 쓰도록 유도하는 거죠.”
 
우리말을 학문에도 계속 쓰면서 낱말의 사슬을 만들어야 한다는 구씨는 최근 들어 보폭을 더욱 넓히고 있다.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와 임옥상 화백의 발의로 올해 5월 출범한 세계문자연구소에서 이사로 활동하는 한편 이 단체의 첫 대외 행사인 '세계문자심포지아2014'의 학술사업단장을 맡았다.
 
"영어의 기득권은 저희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형식을 조금 바꾸면 공존할 수 있어요. 발표자는 원하는 말과 글로 발표하고 통역과 번역을 여러 말로 다 제공해 그걸 모두 기록으로 남기는 방법이 있지요. 다른 국제학술 대회가 열릴 때 한글로 쓰고 발표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도록 이번 심포지아에서 먼저 조금씩 시도해보려고 해요."
 
세종문화회관 일대에서 24일부터 내달 2일까지 10일 간 열리는 이번 심포지아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3억원, 서울시와 종로구청으로부터 2억원 등 총 5억원의 예산을 지원 받아 조촐하게 시작한다. 구 교수는 "세계문자심포지아를 성공적으로 안착 시킨 후 세계문자연구소를 국제기구로 편입시킨다는 게 우리의 궁극적인 비전"이라고 소개했다. "사실상 자원봉사예요. 그런데 이렇게 재미있는 것은 오랜만이네요." '모든 문자는 평등하다'고 부르짖는 이들의 야심찬 도전이 어떤 열매로 맺어질 지 자못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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