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니 모레티의 영화> 이바 마지에르스카, 라우라 라스카롤리 공저 | 정란기 옮김 | 본북스 펴냄
답답했다. 과문한 탓에 책에 등장하는 이탈리아 인의 이름이 다음 장을 넘길 때면 기억나지 않았다.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듣던 프란체스코 토티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책 6페이지의 '옮긴 이의 말' 다섯 번째 줄을 보면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난생처음 스파게티를 주문할 때와 같은 부담감을 견뎌낸다면 이 책을 읽을 준비가 된 셈이다.
그렇다면 책 내용은? 답답하지 않다. 점입가경이라는 상투적 표현이 허용된다면 그리하리라. 책 소개를 간단히 하면, 이 작품은 지난 2001년 칸 영화제에서 '아들의 방'으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난니 모레티 감독을 다뤘다. 하지만 책은 유명한 이탈리아 영화감독의 인생과 그의 작품만을 담은 게 아니다. 사람이 왜 일기를 쓰는지 정신분석학을 동원해 설명하고, 현대 사회의 가족 문제와 부모의 역할도 되돌아보게 한다. 민주주의가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에 대한 불신과 같은 정치 문제도 이야기한다. 이런 것들이 책 주인공의 삶과 영화를 통해 설명된다. 책이 개인과 가족, 사회 그리고 정치를 훑으면서 독자를 유인하는 사이 긴 이름 따위는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아는 척을 해볼 게 쏟아지기 때문이다.
사실 기자 개인적으로는 난니 모레티가 '1인 제작 시스템'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영화감독이어서 더 눈길이 갔다. 그의 첫 작품도 8밀리 카메라로 촬영한 '나는 자급자족한다'이다. 시나리오를 쓰고 출연도 한다. 영화 제작사를 설립했으며 젊은 감독의 단편영화를 상영하는 영화제 또한 운영한다. 뉴스토마토(토마토TV)도 기자가 텍스트 취재 기사는 물론 영상취재·편집·방송출연까지 하는 '1인 뉴스제작시스템'으로 운영된다. 알았다.
▶ 전문성 : 쉽지 않다. 그러나 참아라. 당신은 곧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감독과 그의 작품을 통해 사람과 정치를 이야기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
▶ 대중성 : 기대하지 마라. 그러나 마이크로에는 매크로가 숨어 있지 않은가. 그리고 남들 다 아는 건 이미 당신도 알고 있다.
▶ 참신성 : 판단하기 어렵다. 책이 설명하는 사람이 일기를 쓰는 이유, 가족 문제, 정치의 위기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다. 이미 그것과 난니 모레티 감독을 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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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괴팍·신경과민·신발 집착·초콜릿 중독자…."
영국 센트럴랭커셔대에서 현대영화를 강의하는 이바 마지에르스카와 아일랜드의 코크 국립대에서 영화사를 가르치는 라우라 라스카롤리가 쓴 '난니 모레티의 영화'는 책 주인공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런 사람과 그의 영화를 왜 알아야 할까. 책은 그 이유를 모레티 감독의 작품에 드러나는 네 가지 기본 주제인 자서전과 가족, 아이러니, 정치 등을 통해 설명한다.
모레티 감독은 자신에 관한 영화를 계속 만들었다. 자서전 혹은 일기를 영화로 만든 셈이다. 영화 속 주인공이 감독 자신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 아니다. 관객이 주인공을 감독이라고 확신하도록 꾸민다고 하는 게 적확하다. 그가 만든 영화 '4월'은 감독의 가족이 참여하고 집에서 촬영했다는 설정이 특징이다. 관객에게 모레티의 삶을 본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다.
그는 일기를 영화로 만든 시도 끝에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이처럼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자서전과 같은 일기 문학이 급증하고 성공을 거뒀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혼란과 파편화가 공동체뿐 아니라 개인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문제로 간주되면서다. 지그문트 바우만도 "사람들은 일기가 개인과 사회에 영향을 주는 담론적 혼란을 인식하고 극복해내는 데 완벽한 도구가 되리라고 생각했다"고 썼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브리짓 존스의 일기',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도 설명 가능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자서전의 모범으로 예술적 정점에 이른 작품으로 꼽힐 정도다. 프루스트가 자신의 문학적 작업을 자신과 사회적 환경을 기술하는 데 국한해 소설 내용이 정확하고 진실하다는 인상을 준 덕이다. 프루스트는 자신과 세계를 기술하는 특별한 시각이 있다는 생각도 거부함으로써 권위자가 됐다는 평가다.
토머스 맬런은 "시나 소설, 그림은 본 뒤에도 작가의 의도가 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일기를 읽으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더군다나 소설이나 시와 달리 일기는 적어도 원칙적으로 완결이 필요 없다. 모네티도 "나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한 것은 자만심 때문이 아니다"라며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을 뿐이고, 나에 대해 말하면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을 예술로 재창조함으로써 과거와 타협한다는 게 저자들의 지적이다. 특히 이런 것들에는 지배적인 이야기가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에 따르면 반복은 가장 매혹적인 방식으로 잊는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작품을 처음 공개한 뒤에도 '이런'이 등장하는 것을 또 생산하면서 자랑스럽지 않은 과거를 흐릿하게 만들어 그것과 결별을 시도한다는 얘기다. 모레티는 그의 영화들에 등장하는 다양한 등장인물 속에 자전적 요소를 넣어 지배적인 이야기로 연결되게 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정신적 외상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는 정신분석학자의 환자와 일맥상통한다는 게 저자들의 설명이다.
모네티는 겸손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이해시키려고 하지 않을 거야. 그저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을 어떻게 다큐멘터리로 말하지? 그리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정확하게 뭐지?"라고 고민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현실을 포착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그에 대한 권리와 능력을 의심했다. 평론가 리노 제노베세는 "그의 영화는 이탈리아인으로서 고통과 시련을 겪으며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다"고 평했다.
이탈리아에서도 산업화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아버지는 직장에서 일하면서 아이들과 만나지 못했다. 현대화가 진행되면서 어머니는 당당하게 경제활동을 하는 게 긍정적 이미지로 그려진다. 모네티도 이와 같은 아버지 역할의 부재에 따른 문제를 겪은 것으로 풀이된다. 전통적 가족 체계의 붕괴에 따른 역할 갈등은 물론 저출산의 문제까지도 모네티의 영화에서 묘사된다는 것이다. 모네티는 이탈리아에서 나타난 정당정치의 무력함도 영화를 통해 지적한다. 민중의 의견이 민주주의를 통해 반영되지 않는 문제가 지적되는 식이다. 우파가 새로운 슬로건으로 득세했지만, 좌파는 그것에 실패하고 있는 점을 꼬집기도 한다.
"제 야망 말인가요? 저는 항상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점점 더 아름답게 말입니다."
모네티가 한 말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러나 모네티는 기억상실을 겪는 영화 주인공을 통해 이것을 극복하는 시도도 꾀한다. 책 자체 별점은 ★★★. 개인적으로 책을 통해 배운 게 하나 있기에 ★ 하나 더. 독자 여러분도 기회가 있다면 이 책 완독을 통해 얻는 게 있길 바란다. 읽기 전에 일기부터 써보는 건 아닐지.
책 속 밑줄 긋기
정신분석학자 에릭 에릭슨
"개인적 정체성이 존재한다는 의식은 두 가지의 동시적 관찰을 토대로 한다.
시간 속에서 자신의 동일성과 계속성에 대한 즉각적인 인식, 다른 사람이 시간 속에서
자신의 동일성과 계속성을 인정한다는 사실에 대한 동시적인 인식이다"
"이 영화감독의 천재성은 자신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의 주인공이 감독 자신이라고 확신시키는 데 있다"
모레티
"나는 감독이 아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그것을 영화로 만드는 사람일 뿐이다"
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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