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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동네문구)①창신동 문구·완구거리 "손님이 없다"
2014-07-21 17:16:42 2014-07-21 17:21:18
[뉴스토마토 이지은기자] 학교 앞을 장식하던 동네 문구점과 도·소매 업체들이 존폐 위기에 놓였다. 문구 제조사들 역시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나라장터나 학습장터의 활성화에 판로를 잃고 휘청이는 가운데, 대형마트의 PB상품마저 가세하면서 이들의 어려움은 생존을 걱정해야 할 극한에 처했다. 특히 낮은 출산율과 스마트기기의 보급 등 업황을 가로막는 요인들이 큰 흐름으로 자리하면서 동네 문구점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 직면했다. 이들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봤다. (편집자)
 
7월 중순 33.6도의 뙤약볕. 교재, 문구사 간판 아래 즐비한 장난감과 과자류, 곳곳에 비치된 인쇄소, 문 닫은 상점들. "10년 전보다 손님이 없다"는 울림이 더운 공기를 적막하게 에워쌌다.
 
달력은 2014년을 가리키고 있지만, 현실은 10년 전보다도 못한 곳. 바로 서울 종로구 창신동 문구·완구거리 일대다.
 
물건을 실은 오토바이, 손님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거리는 한적했다. 몇 대의 오토바이 엔진음만이 울렸고, 이따금 중국인들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7월 중순 오후 1시 쯤의 창신동 문구·완구 거리 모습. (사진=이지은기자)
 
◇문구거리 위상 추락.."매출 70% 급감, 하루도 못 쉬어"
 
1960년대에 생겨난 창신동 문구·완구 거리는 서울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에서 신설동 방향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100여곳의 점포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전통 시장이다. 
 
이 거리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매출이 5~6년 전 대비 70%가량 급감하면서 생계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 주력 제품인 문구를 뒤로하고 완구, 식품, 생활용품 등으로 품목 다변화에 나선 곳도 적지 않다.
 
J상점은 '학습교재문구 전문 도매점'이란 간판 아래 초콜릿, 사탕, 장난감이 가득했다. 한쪽 모퉁이 아래에는 '식품 도매 전문'이란 플래카드도 걸려있다.
 
35년째 J상점을 운영 중인 정모씨는 "수수깡, 고무 찰흙, 자석 등 학습재료가 안 팔리니 고육지책으로 완구와 식품 도매에 뛰어들게 됐다"고 말했다. 매출 부진으로 J상점의 직원 수는 과거 20명에서 현재는 4~5명으로 대폭 줄었다.
 
이 상점에 10년째 납품하고 있는 한 학습재료 제조업체 사장은 "학교에서 준비물을 나눠주다 보니 예전에는 연간 60만개까지 나가던 상품이 올해는 3000개도 못 팔았다"며 한숨을 쉬었다.
 
◇학습교재 문구 전문 도매점인 J상점. (사진=이지은기자)
 
이처럼 실적이 급감한 것은 줄어든 학생 수와 학교 준비물제도 등 변해버린 유통구조 탓이다.
 
매출 급감은 J상점만의 일이 아니었다. 30년째 U상점을 운영 중인 한모씨는 "필기구 위주로 장사했는데, 안 되니까 다른 집에서 잘 팔리는가 싶으면 우리도 가져다 놓고 하다보니 품목이 다양화됐다"며 가게 앞에 쌓여있는 물건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이 상점에는 문구용품, 우산, 우비, 수납장, 장난감 등 없는 것이 없었다. 한씨는 "살아남기 위해 품목 다변화를 시도하다 보니 번 돈이 고스란히 투자에 사용되고 있다"며 "재고 문제도 만만찮다"고 토로했다. 
 
◇생활용품이 가득한 U상점. (사진=이지은기자)
 
14년째 펜 등 문구 도매업을 하는 T상점의 정모 사장은 "예전에는 하루 동안 100여명의 소매점주가 방문했는데, 이제는 1~2명 올까 말까인 데다, 학교에 납품하던 중간 납품업자들도 사라졌다"며 "자릿세도 나오지 않는 마당에 직원을 고용할 수 없어 4명을 해고하고, 동생이 아르바이트 식으로 도와주고 있다"고 말했다.
 
40여분간의 이야기 중 팔린 물건은 만년필 열 자루, 세금계산서 세 뭉치, 테이프 한 상자가 전부였다. 물건을 빌리러 온 이웃 상점 점주 등의 소리만 들릴 뿐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상점 안으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30년째 문구 도매업에 종사 중인 S상점 사장은 "자릿세라도 벌려면 쉴 수가 없어 명절만 빼고 연중 내내 가동하고 있다"며 "돈도 돈이지만, 쉬질 못하니 이쪽 사람들이 더 지치는 것"이라고 전했다. 
 
◇소매점도 줄도산 추세..사라진 신학기 효과
 
도매업체들의 몰락은 사라진 소매업체가 원인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전국의 문구점 수는 1999년 2만6986개에서 2011년 1만5750개, 2012년 1만4731개로 13년 새 절반가량 줄었다. 
 
또 2012년 기준 점포당 월평균 순이익은 138만2866원으로 확인됐으며, 소매점 60%가량의 점포당 월평균 순이익은 72만3493원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의 문구점 수 변화 추이. (자료=통계청)
 
20년째 학교 앞 문구점을 운영했던 한 점주는 "예전에는 장사가 잘 돼 문구점으로 번 돈으로 아이들 대학까지 보냈다"며 "하지만 임대료는 고사하고 내 인건비조차 벌 수 없어 5년 전 문을 닫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만둘 때 나 혼자만 남았다"며 "문구업은 사양산업"이라고 덧붙였다. 
 
신학기 효과도 사라진 지 오래다. 대부분 문구점은 학기가 시작하는 3월과 9월에 많이 벌어 비수기를 충당하는 구조였지만, 학습준비물 지원제도가 시행된 후부터는 성수기 없이 늘 비수기 상태다. 
 
창신역 주변에서 초등학교 문구점을 운영 중인 이모씨는 "학생 수도 줄었지만, 옛날같이 과목별로 쓰는 것이 아니라 한 권으로 돌려쓰고 있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학교에서 지원해주기 때문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신학기 효과마저 사라졌다"며 한편에 쌓인 공책들의 먼지만 탈탈 털었다. 
 
아현역 인근 초등학교 주변에서 6년째 문구점을 운영 중인 정모씨는 "처음 시작할 때 4~5개의 문구점이 있었지만, 지금은 우리만 남았다"며 "경쟁자 수는 줄었지만, 6년 전보다 매출은 50%나 감소했다"고 설명했다.
 
정씨는 남편이 문구 도매업을 해 물건을 저렴하게 가져올 수 있지만, 판매 자체가 안 되니 임대료조차 내기 힘든 상황이다.
 
정씨는 "학교에서 다 나눠주고, 엄마들은 대형마트에서 학용품을 사주니 학생들이 문구점에 들를 일이 없다"며 "급하게 필요해서 사는 경우 빼곤 학생들의 발걸음이 끊겼다"고 하소연했다.
 
◇학용품 대신 장난감이 즐비하 학교 앞 문구점. (사진=이지은기자)
 
◇가장 큰 문제점은 이구동성 "학습준비물 지원제도" 
 
골목상권의 대표적 업종인 도·소매 문구업이 사라진 데는 '학습준비물 지원제도'가 주요 원인으로 꼽혔다.
 
학습준비물 지원제도는 초등학생에게 기본 학용품과 색종이, 고무찰흙 등 수업 준비물을 학교가 무상으로 지급하는 것으로 1998년 도입, 2001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일선 학교는 관련 예산으로 조달청이 운영하는 나라장터나 한국교직원공제회가 운영하는 학교장터 등을 통한 전자입찰 방식으로 학습준비물을 일괄 구매하고 있다.
 
문제는 이 제도로 입찰에 참여하기 어려운 업체들의 매출이 급감했으며, 실제로 참여를 해도 이윤이 적다는 데 있다.
 
나라장터에 참여 중인 U상점의 한 사장은 "어떤 경우는 2005년 견적서를 가지고 입찰공고를 올려 도저히 그 가격에 맞출 수 없는 경우가 많다"며 "10%도 안 되는 이윤을 위해 30% 넘게 손해 보는 일이 다반사"라고 전했다. 이어 "어떻게든 유통망을 넓혀야 하므로 울며 겨자 먹기로 참여하고 있다"며 계산기만 두드렸다. 
 
이와 관련 상점 점주들은 학습준비물 지원제도가 공교육 부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견도 제시하고 있다. 
 
J상점의 정 사장은 "학교장터는 최저 입찰제로 운영되고 있어 가격을 맞추기 위해 낮은 질의 제품을 공급할 수밖에 없다"며 "학생들이 좋은 학용품으로 배울 기회를 박탈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이구동성으로 "모든 정책이 문구점을 활성화하는 것이 아니라 문구점을 없애자는 분위기로 가고 있다"며 "동네상점에는 빵집, 슈퍼뿐만 아니라 문구점도 들어가는데 상대적으로 소외돼 있다"고 불만을 표했다.  
 
문구점살리기연합회 관계자는 "학습준비물 지원제도의 영향으로 문구 도·소매 업체들이 어려워졌고, 제조사들에게도 실적 악화가 도미노처럼 번졌다"며 "복지가 경제의 순환고리가 돼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도록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약 2주 전 문을 닫은 서울 A초등학교 앞 문구점. (사진=이지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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