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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철

(뉴스카페)'삐라'

생계형기자 분투기

2020-11-02 23:20

조회수 : 2,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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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간 '삐라(불온선전물 또는 불온전단)' 사태로 연일 시끄럽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삐라'란 무엇인지부터 알고 가려 했으나 인터넷에 잘 정리돼 있어 이에 갈음한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삐라'에 대한 학술적 연구나 남북간 비방용 선전물의 역사적 고찰이 아니다. 순수한 필자의 개인사다.

필자가 태어난 곳은 강원도 인제 하고도 기린면 현2리 3반이다. 마을 이름은 '하마로(이 이름에 대해서는 훗날 설명할 기회가 있을 줄로 안다).' 지번만으로도 두메산골, 하늘 아래 첫 동네, 그냥 완전 깡촌이다. 아니,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의 그 곳. 거기서 몇 발자국 더 산으로 들어가는 '깡촌 오브 더 깡촌'이라 해야 옳다.

좌우간, 지정학적으로는 휴전선과 가깝고 한반도의 전략전술상 산악전이 특징이었던 관계로, 내고향 기린면 현리는 '깡촌 오브 더 깡촌'의 위상에 걸맞지 않게 한반도에서도 손꼽히는 요충지였다. 무려 대한민국 육군 제1야전사령부(일명, 통일대) 예하 3군단이 주둔해 그 명예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런만큼 북한으로서는 '삐라'를 하루가 멀다하고 뿌렸던 곳인데, 계절풍이 불적에는 하늘에서 눈처럼 내리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양민들로서는 민구스럽게도 이 '삐라'가 살림에 적잖이 보탬이 됐다. 삐라를 주워다가 가까운 경찰서나 인근 군부대에 신고하면 공책이며 30cm 플라스틱 자, 분도기 등을 상으로 줬는데, 이게 교육비의 상당부분을 벌충할 수 있어 아주 쏠쏠했다. 애고 어른이고 꽤 짭짤한 부업이다 보니, 개중에는 삐라를 줍기 위해 주말에는 산에 오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각급 학교는 아예 '불온선전물 수거의 날'을 잡아 비장한 분위기로 '반공·멸공의 정신'의 고양과 함께 열심히 삐라를 긁어 모은 학생들을 포상하기도 했다.

 
 
 
일곱살쯤 됐었을까. 6~7세 코흘리개 꼬꼬마였던 필자도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일찍이 감지하고 있었다. '삐라'가 뭔지는 몰랐지만 빳빳하고 번쩍번쩍 기름을 먹인 종이에, 총천연색 사진이랑 신기한 그림이 그려진 것이 참으로 신기한 놀이감이었음은 물론, '이것을 누구든 어른에게 가져다 주면 귀여움을 받을 수 있겠구나'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봄날. 그러니까 내가 예닐곱 되던 봄에 결국 사건은 일어나고 말았다. 그날은 엄마가 더운 밥에 간장하고 계란, 마아가린에 김가루를 조금 넣어 비벼준 밥을 김치를 얹어 정말이지 맛있게도 점심을 먹은 날이었다. 한그릇 더 바랐지만 더 먹었다가는 위보다 옆으로 퍼질 것이라는 엄마 잔소리에 밥숟가락을 내팽겨치듯 내려놓은 필자는 집 앞 신작로로 놀러 나왔는데, 어디선가 모를 곳에서 들리는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대번에 마음을 빼앗겼다. 노래라고 해봤자 '멸공의 횃불'이나 '전선을 간다' 따위의 군가였을 것이나 아무리 둘러봐도 도무지 노래가 나오는 곳을 알 길이 없었다.

 

'오메!'

한참을 두리번 거리던 나는 우연히 하늘을 보았을 적에 짧은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아름다운 곡조의 근원지는 다름 아닌 손에 잡힐 듯 하늘을 날고 있는 인근 3군단 소유의 'L4 정찰기'였던 것이다.

여우에라도 홀린 듯 군가를 따라 부르며 바로 'L4 정찰기'의 궤적을 쫓아 신작로를 내리 달렸다. 한참이나 달렸을까. 'L4 정찰기'가 날던 하늘과 신작로가 갑자기 뒤집히는가 싶더니 고만 아득해지고 '띠~' 하는 소리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눈을 뜬 곳은 우리집 안방이었다. 엄마가 작게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새카맣게 긴장된 아버지 얼굴이 보였다. 세살 된 여동생이 내복 바람에 웃목에 앉아 뭔가를 흔들고 있었는데, 아버지 얼굴이 너무 까매 왠지 웃음이 샐 뻔한 걸 이로 꾹 눌러 참았다. 그렇게 나는 다시 잠이 들었다. 

그 다음날엔가 엄마로부터 전해들은 경위인 즉슨. 한시간이 넘어도 애가 안 들어 오길래 무슨 일인가 하던 차에, 건너편 사는 친척인 필자 누나가 얼굴이 하얘져 나를 업고 우리집으로 들이닥쳤다. 중학생인 필자누나는 덕다리 소재 학교를 파하고 강을 건너 우리 동네로 들어오는 다리를 지나고 있었는데, 꼭 나만한 애가 강가 호박돌 위에 엎드려 있길래 내려가 보니 내가 눈이 하얗게 뒤집혀 있었더란다. 스스로 놀란 마음을 추스리고 몸도 개운해졌을 때 쯤 엄마는 "또 비행기 따라 갈 것이냐?"며 방심하고 있던 나를 매우 치셨다. 그날 필자 누나가 아니었으면 필시 나는 피어보지도 못하고 요절했을 것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일관된 엄마의 주장이시다. 

이것이 '삐라'에 대한 나의 강렬한 첫 기억이다.

 
600

번 외.

그 일이 있고 3년 쯤 뒤 나는 또 한번 그 다리에서 추락했다. 비교적 작은 강 위의 작은 콘크리트 다리였던 그 다리는 따로 난간을 세우지 않고 한 1m 간격으로 꼭 두부만한 돌출부를 만들어 놨었는데. 다리를 건너던 나는 왼발로는 다리 중간을, 오른발로는 그 돌출부를 꼭꼭 밟으면서 건너던 중 또 다시 고만 아득해지고 '띠~' 하는 소리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행히 곧바로 정신을 차려 몸을 일으켰는데, 저기 강가 풀숲 뒤에서 그런 나를 지켜 본 아랫집 살던 이금순이가 "죽었나봐"라고 읇조렸던 것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그집 상수 형이 나를 업고 집으로 데려다 주지 않았다면 나는 금순이가 방심하고 있을 사이 고년의 궁둥이를 한번 씨게 걷어 차줬을 것이다. 아프기도 하였거니와 금순이 고것 앞에서 추락한 것 때문에 쪽팔려 죽을 뻔 했다.

어쨌거나 지금도 엄마는 "그때 두번이나 다리에서 추락했음에도 머리가 터지거나 팔다리가 부러진 데 없이 무탈했음은 조상이 돌 본 덕"이라 감사하고 계신다. 다만, 내 키가 더 클수 있었음에도 아쉽게 성장이 멈춘 것과 가끔 맹한 짓을 하고 있는 연유 역시 같은 배경에 기인한 것이라시며 못내 아쉬워 하고도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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