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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철

(토마토칼럼) '구공판'은 대체 어느 나라 말인가?

2020-04-28 06:00

조회수 : 10,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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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찰청은 2007년 9월7일 검찰이 작성하고 있는 결정문 작성방식을 대대적으로 개선한다고 발표했다. 대검은 “해방 뒤 일본으로부터 물려받은 결정문 작성방식을 법률 수요자인 국민 중심으로 그 체제와 문장, 용어를 바꾸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2006년 3월 정부와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검찰 결정문을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검찰 차원에서 통일된 결정문 작성지침을 마련하기로 했다.
 
개선 대상으로 지목된 용어 중 대표적인 것이 '구공판(求公判)'이다. 실무에서는 '검찰이 형사 사건을 법원에 기소하여 정식 재판을 청구하는 일'쯤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국어사전에는 없는 말이다. 같은 의미로 '기소'가 있을 뿐이다. 국립국어원도 국민들이 단어의 뜻을 직접 풀이하거나 규정할 수 있는 개방형 국어사전 '우리말샘'에만 이 단어를 올려놓고 있다. 쓰고 있는 예로는 신문기사만 올라 있다. 언론 역시 일제의 잔재가 깊이 뿌리 박힌 곳이다. 
 
법체계상으로 봐도 헌법은 물론 하위법 어디에도 구공판이라는 단어는 없다. 그러나 '공판사건 기록관리부 제정·시행(2019년 7월4일 시행)' 등 대검 예규나 검찰통계사무규정(2011년 5월4일 시행)' 등 법무부훈령에는 버젓이 살아 있다. 보도자료는 말 할 것도 없다. 대법원 판결문에도 부지기수다. 
 
한국법제연구원이 도중진 국가안보융합학부 교수 등에게 연구를 의뢰해 2007년 10월31일 보고 받은 <청소년보호 관련법령의 법령용어와 문장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은 구공판에 대해 "구(求)하다"는 '필요한 것을 찾거나 또는 그렇게 하여 얻다' 또는 '상대것이 어떻게 하여 주기를 청하다' 등의 의미"라며 "이 용어에 대해 법제처 정비편람에서는 순화방안을 직접적으로는 내놓고 있지 않으나, 이는 '求める'라는 일본어에서 온 표현으로 적절한 우리말로의 순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연구팀 지적대로 '구공판'이라는 용어는 순화가 필요하다. 약식재판을 청구한다는 뜻의 '구약식'도 같다. 우리 어법과 문법에 맞지 않는 '공소 제기(公訴 提起)' 역시 마찬가지다. 기소(起訴)가 '검사가 특정한 형사 사건에 대하여 법원에 심판을 요구하는 일'로 정식재판 청구인지 약식재판 청구인지 불분명하다면 정식재판 청구를 '기소'로, 약식재판 청구를 현재도 자주 쓰고 있는 '약식 기소'로 쓰면 될 일이다. '정식 재판에 넘기다', '약식 재판에 넘기다'로 대체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글이란 필요적으로 경제성이 요구되지만, 경제성만 강조하다 보면 '소통'이라는 본질적 기능이 침해된다.
 
법학과 법률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제왕학'이나 '제왕의 규칙'으로 떠받들어 진 이유는 기득권층과 권력자들의 이익을 위해서였다. 그 핵심 장치가 바로 '어려운 말'이다. 읽을 줄은 알아도 무슨 뜻인지 모를 '국적 불명, 탈문법적 용어'로 법을 도배해 놓고 일반 국민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21대 총선을 끝으로, 20대 대통령 선거 전까지 향후 2년간은 검찰개혁과 사법개혁의 시간이다. '검·경 수사권 조정', '상고심제 개혁'도 좋지만 정녕 국민을 위한 개혁이라면 법과 국민을 막고 있는 언어의 장벽부터 허물어야 할 것이다.
 
최기철 법조데스크(lawc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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