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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급심 "대법원이 '사후영장제도' 의미 없게 만들어" 작심 비판

의정부지법 형사1부 "체포현장 임의제출 압수수색 허용은 잘못"

2020-04-2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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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토마토 최기철 기자]하급심이 현행범 체포시 임의제출에 의한 증거물 압수에 대한 대법원 입장이 헌법상 영장주의를 위배하고 있다고 비판한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법원에 따르면, 박씨(일용직 노동자)는 2018년 5월 고양시 일산서구에 있는 한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앞에 서 올라가고 있는 여성 A씨의 치마 속을 자신의 휴대전화로 4회에 걸쳐 몰래 촬영하다가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박씨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박씨 소유의 휴대전화기를 임의제출 방식으로 압수했다. 검사는 휴대전화기 저장정보를 분석한 결과 당일 범행을 비롯해 총 5명에 대해 11회에 걸쳐 같은 수법으로 이른바 '몰카'를 촬영한 혐의(성폭력처벌법 위반)로 기소됐다.
 
2015년 11월13일 오후 경기 안산 상록구 본오동의 한 다세대주택에서 재혼한 아내 A씨의 딸 2명 등을 잡고 인질극을 벌이다 체포된 전남편이 경찰에 의해 끌려나오고 있다(기사와는 관계 없음). 사진/뉴시스
 
1심은 박씨의 공소사실을 모두 유죄로 인정하고 징역 1년2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보호관찰과 성폭력치료강의 수강 40시간 등을 명령했다. 전에도 강간치상죄 등 범죄를 저질러 복역한 적이 있지만 수사와 재판 단계에서 깊이 뉘우치고 있는 점, 배우자와 0~11세인 네 자녀가 있고 자녀들 중 두명은 지적장애가 있는 점 등을 고려했다. 그러나 검사가 양형이 너무 가볍다고 항소했다. 
 
2심은 박씨의 범죄 가운데 일부만 유죄로 인정했다. 의정부지법 형사1부(재판장 오원찬) "대법원이 체포현장에서 임의제출 형식에 의한 압수수색을 허용함으로써, 실무에서는 피의자 임의제출에 의한 압수가 광범위 한 반면, 긴급압수수색절차 및 압수물에 대한 사후영장 절차는 거의 없는 것이 통례"라고 지적했다. 
 
또 "수사기관은 현행범으로 체포된 피의자에게 절대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갖기 때문에 피의자가 임의제출을 거절하기는 사실상 어렵다"면서 "체포된 피의자가 소지하던 긴급압수물에 대한 사후영장제도는 앞으로도 형해화(형식만 있고 가치나 의미가 없게 됨)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그렇다면, 현행범으로 체포된 피의자가 소지하던 물건은 형사소송법 218조에 따라 영장 없이 압수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이와 같은 해석이 비록 대법원 판례에 어긋나기는 하나, 영장주의 원칙에는 오히려 충실하다"고 판시했다
 
이어 "결국, 경찰이 피고인의 휴대전화기를 형사소송법 218조에 따라 압수했더라도 실질은 형사소송법 216조 1항 2호에 따라 압수한 것이기 때문에 사후 영장을 발부받지 못한 휴대전화기에 대한 증거능력은 인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다만, 박씨의 범행이 중한 점을 고려해 1심 선고형을 유지했다. 이에 검사가 상고했다.
 
형사소송법 218조는 영장이 필요 없는 압수 상황에 대해 '검사, 사법경찰관은 피의자 기타인의 유류한 물건이나 소유자, 소지자 또는 보관자가 임의로 제출한 물건'이라고 정하고 있다. 같은 법 216조 1항은 '피의자를 체포 또는 구속하는 경우에 필요한 때에는 영장 없이 강제처분을 할 수 있다'면서 2호에 '체포현장에서의 압수, 수색, 검증'을 열거하고 있다. 다만 이때는 같은 법 217조 2항에 따라 48시간 이내에 사후 영장을 발부받아야 한다.
 
대법원 3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그러나 박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검사의 상고를 받아들여 일부 무죄 판결한 원심을 깨고, 다시 판단하라며 사건을 의정부지법으로 되돌려 보냈다고 26일 밝혔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종전의 대법원 판례를 인용해 "범죄를 실행 중이거나 실행 직후의 현행범인은 누구든지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고,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은 피의자 등이 유류한 물건이나 소유자·소지자 또는 보관자가 임의로 제출한 물건을 영장 없이 압수할 수 있다"면서 "현행범 체포현장이나 범죄 현장에서도 소지자 등이 임의로 제출하는 물건을 형사소송법 218조에 의해 영장 없이 압수하는 것이 허용되고, 이 경우 검사나 사법경찰관은 별도로 사후에 영장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현행범 체포현장에서는 임의로 제출하는 물건이라도 형사소송법 218조에 따라 압수할 수 없고, 형사소송법 217조 2항이 정한 사후영장을 받아야 한다는 취지의 원심 판단은 잘못됐다"고 판시했다.
 
또 "원심으로서는 전혀 쟁점이 되지 않았던 휴대전화기 제출의 임의성 여부를 직권으로 판단하기 전에 추가적인 증거조사를 하거나 임의성에 대해 증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검사에게 증명을 촉구하는 등의 방법으로 더 심리해 본 후 판단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에 대해 "인권을 두텁게 보호하기 위해 증거물 압수에 대한 임의성 판단을 엄격히 해야 한다는 것이 하급심 취지이고 대법원도 이를 존중한다"면서 "일부 법관들도 이에 대한 필요성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다만, 재판부는 형사소송법 입법 취지와 종전 대법원 판례에 대한 변경을 논할 만한 단계는 아직 아니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최기철 기자 lawc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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