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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익도의 밴드유랑)빛으로 물결치는 야경과 오드리노

미국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 작품서 가사 영감 “스토리 사진찍듯 포착”

2020-04-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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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밴드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죽어버린 밴드의 시대’라는 한 록 밴드 보컬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밴드 오드리 노.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손경호(드럼), 하양수(기타, 프로듀서), 김명환(건반), 제이 마리(보컬, 기타), 박영신(베이스).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밴드 오드리노는 지금까지 5곡, 그러니까 EP 1장 수준의 싱글들을 차례로 발표해왔다. 2일 서울시 은평구 갈현동 인근 세계적인 기타, 이펙터 제조사 ‘물론’의 본사에서 이들을 만났다. 이들은 이 곳을 1주 한 번 합주실로 쓰고 있다.
 
이 다섯 멤버[하양수(기타), 김명환(건반), 제이 마리(보컬), 박영신(베이스), 손경호(드럼)]가 합쳐 내는 음악은 멜랑콜리 미학이 넘실거린다. 주로 사랑과 우정에 관한 노래는 우울을 머금은 소리 풍경에 젖어 나른하되 아름답게 들린다. 보컬 제이의 목소리가 두드러지는 사운드는 젊은 시절의 캐스 블룸이 부른 영화 ‘비포선라이즈’ OST를 떠올릴 정도로 아련하다. 섬세하고 여리한 보컬이 밴드의 큰 중심을 잡는 부분에선, 장르는 다르지만 스코틀랜드 신스팝 밴드 처치스도 겹쳐 보인다. [뉴스토마토 기사 참조, (권익도의 밴드유랑)멜랑콜리 미학으로 그려낸 사랑, 오드리 노] 
 
감성적인 영화 한 편이 흘러가는 듯한 가사는 제이의 작품이다. 그는 “실제로는 영화보다 책으로 영감을 얻는 편”라 했다. 2018년 처음으로 발표한 싱글 ‘Scientist's Daughter’는 미국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의 대표작 ‘라파치니의 딸(Rappaccini's Daughter)’ 줄거리에서 모티프를 얻은 곡. 정원에서 독초 기르는 의사, 그 딸을 사랑하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다.
 
“책을 읽으면서 스토리가 주는 감정, 이미지를 사진 찍듯 머릿속에 저장해요. 가끔 그 날, 그 순간의 감정을 핸드폰에 한 두 줄로 적어 두기도 하고요.”(제이)
 
제이 마리(보컬. 기타). 사진/오드리노
 
함축적인 시어라기 보다 이해하기 쉬운 에세이 같은 언어들이다. ‘편지지에 사랑을 적어 접어 종이 비행기로 날리’(곡 ‘Paper Airplane’ 중)고 ‘자신을 삼킬 듯한 하늘 아래 좋은 소식들을 향해 팔을 뻗는’(곡 ‘Lucky’ 중)다. 회화적이되 직관적인 표현들은 사랑, 우정 같은 보편적 삶을 그린다.
 
전반적으로 사운드는 어둡고 우울하지만 밴드는 나름의 재치적 요소를 가미하고 있다. 이를테면 곡 ‘Scientist's Daughter’의 도입부 아르페지오와 보컬의 맥을 뒤엎는 드럼의 레게 박자 같은 사운드는 명백히 의도한 결과다. “편안하게 흘러가는 사운드에 어느 정도 위트감을 넣고 싶었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레게 박자가 언뜻 우리나라 ‘뽕짝’ 리듬 같은 느낌도 있을 거예요. 그렇다고 저희 음악이 여느 밴드처럼 파격, 실험을 추구하진 않아요. 어떻게 보면 뻔한 음악인데도 조금 달라보이는 색깔 그런 걸 고민하고 있어요.”(양수) “모호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미학이랄까요. 왜, 박찬욱 감독의 필름회사명 ‘모호필름’처럼요.”(명환) “잭슨 폴록 같은 추상화 느낌?”(영신) 잠자코 듣고 있던 제이가 “아, 한국말 너무 어렵다” 한다. 모두들 함박 웃음을 터뜨린다.
 
손경호(드럼), 김명환(건반), 박영신(베이스).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전체 프로듀싱을 담당하는 양수는 특히 사운드의 공간감에 심혈을 기울인다. 밴드의 몽환적 색감을 위해 녹음, 믹싱(개별 악기 녹음 후 이펙터, 리버브 등 장치를 써 에코나 잔향 등의 특수효과를 가하는 과정) 단계에 각별히 신경 쓰는 편이다.
 
뮤지션들에게 이 ‘녹음-믹싱 단계’는 청자의 경험을 완전히 달라지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시규어로스나 아델 같은 뮤지션들이 몽환적 소리를 잡기 위해 여러 공간을 찾아다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스웨덴의 어느 스튜디오의 경우는 아파트 2~3층 높이 엘리베이터에 드럼을 싣고 오르락, 내리락 하며 소리를 찾는다.
 
“같은 음악이라도 어떻게 녹음하고 믹싱 하냐에 따라 청자의 경험은 완전히 달라지죠. 몽환적인 느낌이 강한 오드리 노의 음악은 적당한 ‘울림’ 정도가 필요해요. 컴퓨터 후반 작업을 많이 하는 편이예요.”(양수)
 
위치스 출신의 하양수(기타, 프로듀서). 사진/오드리노
 
크라잉넛, 노브레인 이후 ‘펑크 록’ 세대로 활동한 양수는 밴드신의 변화도 온 몸으로 체감하고 있다. 홍대 인근의 라이브 클럽이 사람들로 들끓던 2000년대 초를 생각하면 지금은 상전벽해 수준이다. 그는 “이름이 알려진 밴드들이 클럽 활동에 나서면 지금보다 홍대에 활기가 더 생기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양수에 앞서 원더버드로 활동했던 경호 역시 “술은 홍대에서 먹고, 공연은 딴 데서 하는 것 같다”며 묵직하게 얘기했다.
 
밴드는 최근의 케이팝 효과에 대해서 “좋은 현상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스스로 소통에 적극 나서는 케이팝 아티스트들을 보며 이들도 배우는 점이 많다. 밴드 역시 보컬 제이가 사운드에 어울리는 색감의 영상을 제작, 편집, 디자인해 팬들과 소통한다. 오는 4월 말 경, 밴드는 새 싱글을 계획하고 있다. “자본이 많지 않아 쉽지는 않지만 하나라도 퀄리티 있게 만들어보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케이팝이 세계 시장으로 가는 것은 좋은 현상이고, 우리도 멈추지 않고 꾸준히 하다보면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어요.”(양수)
 
서로 각자의 밴드에서 활동하던 멤버들은 좋아하는 뮤지션도 제 각각이다. 명환은 가야금 명인 황병기와 영화 ‘불의 전차’ OST로 유명한 작곡가 반젤리스를, 양수는 오푸스 오렌지 같이 아기자기한 음악들을 좋아한다. 영신은 DJ 쉐도우와 블록헤드, 톰요크를 제이는 프랑스, 핀란드 혼성 인디 팝 듀오 더 두(The Dø)와 미국 뉴욕 출신의 밴드 예 예 예스(Yeah Yeah Yeahs)를 꼽았다. 경호는 최근 고양이를 하늘로 보낸 뒤 조니 캐시(제이의 고향 출신 가수) ‘For the good times’를 많이 들었다고 했다.
 
세계적인 기타, 이펙터 제조사 '물론'의 본사는 일주일에 한번 밴드 오드리노의 합주실로 변한다. 멤버들이 합주 전 연습할 악보를 공유하며 논의하고 있다. 사진/밴드 오드리 노
 
마지막으로 이들이 지금까지 낸 싱글들을 여행지에 비유해 달라고 요청했다.
 
“(지금까지 인터뷰한) 많은 분들이 우주 어딘가로 가시던데요? 우리도 우주 같은 느낌으로?”(영신) 듣고 있던 양수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우린 우주 느낌까진 아닌 것 같아.”
 
제이가 의견을 냈다. 서울 땅을 처음 밟았을 때의 설렘 같은 표정으로. “처음으로 가 본 나라의 야경 같은 느낌이요. 아주 낯선 기분도 나고, 미국에서 봤던 벌레도 없고!”
 
다른 멤버들이 살을 붙여 나갔다. 음악을 만들 듯.
 
“그래요. ‘밤의 도시’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영신) “후반 믹싱작업을 생각해보면 적막한 밤 말고 빨강색과 핑크색, 노란색 빛으로 물결치는 도시의 야경 같은거. 추상적이지만 아주 뚜렷한.”(양수)
 
“이걸로 가시죠!”(멤버들)
 
밴드 오드리노 공연 모습. 사진/오드리노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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