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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영

(최인숙의 파리와 서울 사이)시몬 베유와 이희호

2019-06-2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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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여사가 지난 10일, 향년 97세로 별세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반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평생을 바친 민주열사, 열악한 한국 여성의 인권신장을 위해 몸 바친 파이어니어(개척자). 언론은 일제히 여성인권·민주주의·평화의 큰 별이 졌다고 보도했고 정치권은 이 여사의 죽음을 존경으로 애도했다.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금껏 한국사회에서 어떤 일이 만장일치를 이루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 이 여사의 인품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다.
 
“독재세력과 싸우는 민주화 투쟁의 동지로서, 매섭고 엄혹한 격정의 세월을 함께 헤쳐 오셨고 독재정권의 서슬 퍼런 탄압도, 죽음을 넘나드는 고난도, 이 땅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향한 두 분(김 전 대통령·이 여사)의 굳은 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수석대변인의 추모사 일부다. 미사여구가 아니라면 이 여사는 우리의 역사적 인물로 조명 받아야 마땅하다. 이 여사는 프랑스의 시몬 베유(Simone Veil) 여사에 견줄 만큼 민주주의와 여성인권의 상징적 존재다. 그러나 전자는 전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반면, 후자는 프랑스의 위인으로 추대되어 팡테옹에 안장됐다. 무엇이 이 두 사람을 이렇게 차이 나게 만들었는가.
 
판이한 역사관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역사는 창조하는 자들의 것이다. 프랑스는 일찍이 베유 여사의 공덕을 인정해 그녀가 생존했을 당시 영웅으로 대우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녀가 타계한 지금도 여전히 후세들의 롤모델로 만들고 가꾸어 나간다.
 
지난 14일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프랑슈 콩테(Franche-Comte) 지방 벨포르(Belfort) 시의 시몬 베유 거리 개막식에 참석했다. 이 행사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는 반유대주의와 인종주의에 대적해 평생을 싸운 베유 여사의 공적을 치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공화당 소속 다미엥 메즐로(Damien Meslo) 시장의 초대를 받은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시몬은 어떤 형태의 반유대주의와 인종주의도 용납하지 않았다. 인간적인 사람을 경시하고 폭력과 원리주의가 판을 치는 지금 이 싸움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시몬의 투쟁은 과거의 투쟁이 아니라 현재도 계속되는 투쟁이다. 프랑스 공화국은 반유대주의와 인종주의를 용서치 않는다. 이는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진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베유 여사의 유럽 건설과 여성인권을 위한 투쟁 역시 치하했다. 2017년 6월30일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베유 여사의 최대 치적은 베유법(임신중절법)을 통과시킨 것이다.
 
시몬 베유를 기리는 곳은 비단 벨포르 만이 아니다. 올해 3월8일 프랑스 중부 오트 사브아(Haute-Savoie) 지방에 있는 한 중학교는 시몬 베유 이름을 학교명으로 삼았다. 국제 여성인권의 날을 맞아 시몬 베유의 여성인권 신장을 기념하고자 학교명을 이 날 시몬 베유로 정했다. 2010년 오트 사브아 뿌아지(Poisy) 시에 개교한 이 중학교는 그 동안 공식적인 이름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시몬 베유 중학교란 문패를 달았다. 이 학교의 실비 자네(Sylvie Jeannet) 교장은 “시몬 베유의 역사와 인생을 기리기 위한 매우 상징적인 일이다. 프랑스 여성인권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예외적인 여성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시몬 베유는 우리 학생들의 롤모델이다” 라고 말했다. 크리스티앙 몽테이유(Christian Monteil) 도 위원장은 “이는 상징적 선택으로 어린 학생들이 시몬 베유의 투쟁과 특별한 삶을 살아온 그녀의 인생역정을 되새기고 영원히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다”라고 덧붙였다. 한 여중생은 “처음에 나는 시몬 베유의 이야기를 몰랐다. 알고 보니 그녀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그녀는 남녀평등을 위해 많은 투쟁을 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프랑스는 역사를 위대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이 여사 역시 한국의 민주화와 여성인권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시몬 베유에 비하면 아주 형편없는 대우를 받고 있지 않는가. 프랑스에 영웅이 많은 것은 우리보다 훌륭한 인물이 많아서가 아닐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보통의 인간에 비해 무언가 특별한 삶을 살며 공적을 이루면 이를 기억하고 후대에 귀감이 되게 하려는 역사를 만든다. 베유 여사나 이 여사가 여성인권을 위해 투쟁한 것은 그리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두 나라 역사관의 차이로 전자는 프랑스 현대사의 위인으로 추앙받고 기억되는 반면, 후자는 전혀 그렇지 못하고 있다. 여성계가 이 여사의 뜻을 이어받아 여성인권을 발전시키겠다고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두고 볼 일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영웅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여사를 진정 우리 사회의 큰 별로 여긴다면 후대의 귀감이 될 수 있도록 역사를 써서 남겨야 한다. 프랑스처럼 곳곳에 이름을 붙여 상징화하고 기억하게끔 하는 작업도 고려할 만하다. 이는 비단 이 여사에게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귀감이 된 삶을 살다 간 다른 분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창조야 말로 역사의 시작이다.
 
최인숙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sookjuliette@yahoo.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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