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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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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철학 그리고 피아노
⑤樂

요한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2019-01-10 17:37

조회수 :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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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게임하는 아이.
어른들은 셧다운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린다.
게임을 밤새 하면 나쁜 아이가 된다는 게 이유다.
나쁜 아이가 되는 것은 게임의 폭력성 때문일까?
부모들은 보통 게임하는 아이들을 말린다.
성적저하와 불량학생들 때문이다.

게임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재미있기 때문이다.
밤새 게임하는 것은 새벽까지 술을 마시는 것과 같다.
아이는 술을 마실 수 없기 때문에 게임에 빠진다.
이는 현실에 몰두할 만한 재밋거리가 없다는 의미다.
놀게 없으니 게임을 찾는다.
하고 싶은 공부하고 맘껏 뛰놀게 하면 게임하고 앉아있을 아이는 없다.
프로게이머가 적성인 아이를 제외하고.




아이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아이들의 현실을 보자.
교육개혁을 외치지만 여전히 SKY가 목적이다.
좋은 직장보내도 그 안에서 또 경쟁한다.
애들은 지친다.
그러니 게임이라도 하는 것이다.

인간은 놀이를 하는 존재다.
일을 하는 것은 놀기 위한 이유다.
누가 노동을 의무라 했나.
사냥은 잡아놓고 몇일동안 놀려고 하는 것이다. 
일도 밥을 벌어놓고 좀 놀려고 하는 것이다.
놀려고 일하는 것이지 일하려고 노는 것은 아니다.

공부도 일도 목적이 되버리면 이렇게 헤매게 된다.
놀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
소처럼 묵묵히 일만하다가는 후회를 하게 된다.
설렁탕이 되기를 기다리는 가마솥 앞의 소꼴이다.

어른들이 밤새 술을 마시는 이유


게임하는 아이 잘못이 아니다.
삶이 재미가 없으니 결국 게임을 찾는 것이다.
삶은 놀이가 돼야 한다.
블록을 가지고 노는 아이에게 그것을 노동으로 전환시켜보라.
게임하는 아이에게 게임을 노동으로 바꿔보라.
당장 질려서 포기한다.

블록이나 게임을 찾는 아이들.
어른들이 밤새 마시는 술이나 쇼핑처럼 즐겁기 때문에 몰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도 공부도 하고 싶은 것을 찾아서 놀이로 즐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마솥 앞의 소가 된다.



놀이하는 인간.
놀기 위한 인간.
놀기 위해 일하는 인간.
일이 중심이 아닌 놀이가 중심이다.

철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이라는 책에서 인간은 본연적으로 놀기 위해 태어났다고 정의내리고 있다. 성실한 사람도 게으른 사람도 결국 재미를 찾기 위해 살아간다. 그 방편으로 일을 하는 것이다. 더 많이 더 재밌는 놀이를 하기 위해 일은 수단이 된다고 말한다.



놀자. 사냥을 미리 해놓고 놀자. 밥을 미리 벌어놓고 재밌게 놀자. 모두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것이다. 먹고 사는 것은 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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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개

칸트 '순수이성비판'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이 많다.
개는 변을 스스로 치우지 못한다.
주인이 치워준다.
가끔 개도 변을 보고 스스로 흙을 덮는 경우가 있다.
교육이 잘 된 개는 정해진 곳에서 용변도 눈다.
그렇다고 우리가 개를 '윤리적인 개'라고 부르지 않는다.
개는 도덕과 윤리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사람이라면 어떨까.
용변을 깔끔하게 처리한다면 도덕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개 처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면 비정상이라고 부른다.

자유는 삶의 목적

도덕과 윤리의 잣대를 사람과 개의 차이를 두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 않다.
도덕과 윤리는 '자율성'을 기반으로 한다.
개는 자유롭지 못하고 사람은 자유롭기 때문이다.

거리에 침을 함부로 뱉으면 타인은 불쾌함을 느낀다.
휴지에 싸서 처리하면 도덕을 안다고 생각한다.
개가 침을 어떻게 뱉던 우리는 윤리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개는 이성에 의한 자율과 타율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윤리는 책임이다

윤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책임 때문이다.
책임은 자유로운 상태의 사람에게 따르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자율에는 윤리와 책임이 생긴다.
타율에는 책임과 도덕이 따르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책임과 윤리에 대한 판단이 흐려지는 경우가 많다.
책임의 유무가 누구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윤리는 교육이 아닌 자율성에서 나온다.
타율이 아닌 자율은 이런 의미에서 인간에게 궁극적인 이유가 있다.
우리가 자유를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이유다.



평화를 유지하는 법

자유로운 인간들이 책임과 윤리를 떠안는 자세.
그럴 경우 나머지 인류도 자유의 영역으로 따라 들어오게 된다.
이로 인한 '영구적 평화'

이 생각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언급된 내용이다.
인류가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
칸트의 '영구적 평화'는 UN의 창설이념이다.

그럼 영구적 평화라고 하는 개념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한 반에서 지갑이 없어졌을때 선생님은 모두 눈을 감게 한다.
그리고 지갑을 가져간 사람 손들라고 하신다.
그러면 조용히 손을 드는 아이가 있다.
지갑을 훔치지 않았음에도 그 아이가 책임을 떠안는 것이다.
자유로운 영역에 있는 사람이 한걸음 양보하는 것.
전체를 위한 책임을 일부 떠안는 자유로운 사람.
그들이 나머지 자유롭지 못한 사람을 자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칸트는 이것을 자율성에 의한 도덕과 책임.
그리고 영구적 평화를 위한 이성의 힘이라고 불렀다.

선생님도 손을 든 아이도 자유롭지 못한 누군가를 구해주기 위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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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설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설 명절은 유통회사를 위한 날이다.
설과 추석은 농경사회 때 만들어진 날이다.
지금은 농사짓는 사람도 많지 않고 대부분 도시에서 산다.
결국 설이 되면 가족끼리 억지로 만나게 된다.
전통을 잇기 위해서다.
그나마 뿔뿔이 흩어져 살기 때문에 명절을 빌미로 한번 모이게 된다.
허례허식처럼 억지로 명절에 만나니 스트레스를 받는다.

가족끼리 만나면 그동안 쌓인 화가 폭발한다.
돈, 교육. 
가족끼리도 서로 비교우위를 드러낸다.
명절에 더 열받는 이유는 이런 것 때문이다.
명절에는 의무적으로 만나게 되니 교도서 면회처럼 돼버린다.

보고 싶어서 명절에 모이는 것일까.,
의무라서 가는 것일까.
어린이날도 마찬가지다. 
5월5일이 끝나면 다시 어색한 아버지로 변한다.



선물인가 뇌물인가


이러다보니 명절엔 감사문자도 대충보낸다.
이런 명절은 없애는 것이 더 좋다.
그러면 만나고 싶을때 진심으로 보게 된다.
명절엔 선물이 뇌물로 변한다.
기업들 경우엔 뇌물 준사람 또 주는 경우도 있다.
명절이 아닌 날에 보자.

어른들은 난이나 꽃, 강아지에 애착한다.
외롭기 때문이다.
어릴 수록 사랑받고 싶어한다.
나이가 들면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안다.
그래서 중년 남성들은 강아지를 품고 산다.
그것들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돌봐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하지 않으면 치명적인 외로움에 봉착하게 되는 것을 누구나 다 안다.
이는 주위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명절에만 사랑하는가.
사랑은 하고 싶을때 해야 한다.
그래서 명절을 없애자.
명절에만 오는 며느리는 달갑지 않다.
불현듯 찾아오는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오는 것이다.

사랑은 얻는 것보다 잃을 것이 두렵다

사랑은 어떻게 돌보고 유지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사랑을 얻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사랑앞에서는 누구나 투사가 되기 때문이다.
단지 유지하지 못할 것을 무서워 한다.
시간이 지나면 식어버리는 사랑의 심장.
그것을 가장 두려워 한다.

그럼 사랑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 사랑유지법이 나온다.
사랑은 살아가는 이유를 제시해준다.
그리고 그 이유를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돌보고 아껴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설거지를 시키지 않는다.
빨래도 시키지 않는다.
신혼때는 물 한방울 안묻히게 해준다.
중년인데 변했다면 사랑도 변한 것이다.
아끼고 보살펴주려는 마음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혹시 누군가의 무거운 짐을 들어주고 싶다던지 더러운 것을 못만지게 하려 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감정이 흘러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별관심이 없다면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사랑해서 결혼을 한다. 
하지만 결혼했다고 다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아내 혹은 남편을 아껴주려는 작은 행동들에서 사랑이 유지됐는지 아닌지가 보인다.
사랑은 아껴주고 보살펴주려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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