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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이회영을 통해 돌아본 11월17일의 의미

2018-11-25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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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영 정경부 기자
우리 민족사를 돌이켜보면 11월17일에 안타까운 일들이 종종 있었다. 일본에 외교권을 뺏기며 사실상 국권을 침탈당한 을사늑약 체결일이 1905년 11월17일이었다. 을사늑약을 계기로 많은 애국지사들이 순국한 것을 기리는 의미에서 정부는 이날을 ‘순국선열의 날’로 제정하고 매년 기념식을 열고 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표본으로 꼽히는 우당 이회영이 중국 뤼순 감옥에서 고문 끝에 순국한 날도 1932년 11월17일이다. 이에 따라 지난 17일 서울 중구 상동교회에서 이회영 선생 순국 86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그의 가문은 ‘삼한갑족(예로부터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으로 불렸지만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모든 기득권을 버린 채 일가 60여명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망명 당시 이회영 일가가 급히 처분해 마련한 돈이 40만원(현재 기준 600억원)임을 감안하면 당시 집안의 위세를 알 수 있다.
 
이회영의 일생을 놓고 국가보훈처는 ‘장래가 보장된 명문대가의 자손임에도 불구하고 일신의 안락과 영화를 버리고 구국운동에 몸을 바친 독립운동가’라고 설명한다. 그는 상당수 명문가 사람들이 일본에 빌붙어 작위와 거액의 은사금을 받고 호의호식한 것과 다른 길을 걷는다. 이회영은 만주지역 첫 항일단체인 경학사를 시작으로 신흥강습소(후에 신흥무관학교로 개칭) 등을 조직하고 고종황제를 내세운 망명정부 설립을 추진했다. 
 
이 와중에 생활은 궁핍해져, 일가가 끼니를 잇기 힘든 지경에 이른다. 아내 이은숙이 국내로 들어가 삯바느질까지 하며 독립운동 자금 마련에 나서야했으며 그의 딸들을 빈민구제원에 맡긴 일도 있었다. 그를 회유하려 했던 일본밀정 김달하가 “천하에 어찌 자기 식생활도 해결하지 못하는 혁명가가 있단 말이오”라고 말할 정도였다. 순국 직전까지 가난은 그에게 있어 숙명과도 같았다. 이같은 어려움에도 그는 뜻을 꺾지 않았다. 1932년 11월 단신으로 상하이에서 다롄으로 떠난 것도 일본 관동군사령관을 처단하기 위해서였지만,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돼 고문을 받다가 순국한다.
 
많은 이들이 시인 윤동주를 기리는 이유는, 그가 현실의 고단함 속에서도 정신적 고결함을 잃지 않은데 있다. 윤동주의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는 시 ‘동주야’에서 “네가 나와 함께 늙어가지 않는다는 게 / 여간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라는 말로 그를 기린다. 청년 시절 패기로 독립운동에 투신했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몸을 사린 사람들이 많기에 시의 울림은 크다.
 
우리가 이회영을 기억하는 이유도, 비록 역부족일지라도 타락한 시대에 치열하게 저항하다가 본래 생각을 지키며 산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회영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망국의 시대에도 민족의 자존심이 조금은 지켜질 수 있었고 결국 광복에 이르렀다. 우리가 매년 11월17일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최한영 정경부 기자(visionch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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