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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보는 일상사-15화)음식에 담긴 민심과 정치

“여러 색깔이 하나를 이루었으니 어서 드시구려”

2018-11-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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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귤’의 계절이다. 시장 곳곳에 풍성하게 쌓인 탐스러운 귤에는 싼 가격표가 붙어 있다. 11월11일 청와대는 지난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 당시 북측이 송이버섯 2톤을 선물한 데 대한 답례로 제주산 귤 200톤을 북한에 선물로 보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답방을 희망하는 의미도 담겼다지만, 무엇보다도, 북에서는 구하기 힘든 귀한 과일을 북한 주민들이 맛보게 하고 싶었다는 뜻에 반대할 국민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처럼 귤 상자에 뭔가 다른 게 들어갔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지난 11일 제주공항에서 장병들이 제주산 감귤을 공군 C-130 수송기에 싣고 있다. 사진/국방부
 
음식의 정치, 정치 속 음식
 
정치인들은 선거 때가 되면 어김없이 재래시장에 가서 국밥을 먹고 떡볶이를 먹으면서 ‘서민 이미지’를 보이기 위해 애를 쓴다. 연례행사처럼 반복되는 그 진부한 연기가 국민들에게 식상하다는 것을 짐작할만한데도 창조적인 선거 전략의 부재 때문인지 그들은 구태의연한 방식을 답습하곤 한다. 사실, 정치인들이 음식을 이용해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흔한 일이다. 청와대의 음식도 그 정치적 함의로 인해 종종 인구에 회자된다. 2016년 8월 박근혜 행정부의 청와대가 새누리당 지도부를 위한 오찬 모임에 내놓은 송로버섯과 캐비아, 샥스핀은 한동안 국민의 화젯거리였다. 11월 14일 구미에서 열린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1돌 숭모제’의 주인공은 막걸리 이미지로 유명한 대통령이었으나, 1979년 10월 26일 그가 피살된 현장인 궁정동 안가의 술상 위에는 시바스리갈이 놓여 있어 그 술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의 국민들에게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9월19일 오후 평양 옥류관에서 열린 남북정상 오찬에서 옥류관의 봉사원이 평양 냉면을 나르고 있다. 사진/뉴시스
 
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남북정상회담으로 인해 평양냉면이 ‘화해의 상징’으로 떠올라 많은 사람들이 냉면집을 찾는가하면, 자유한국당에게는 이 음식이 또 하나의 ‘목구멍의 가시’가 됐다. 2017년 11월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대접한 청와대 만찬의 ‘독도새우’에 대해 일본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항의를 한 것도 음식에 담긴 정치적 함의 때문이다. 다양한 인종의 이민자 집단들이 그들이 속한 사회의 가치에 맞추어 자신의 문화를 용광로에 녹여낸다는 ‘멜팅 팟’(melting pot) 이론에서, 샐러드 그릇 속 샐러드처럼, 각각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조화롭게 공존하자는 ‘샐러드볼’(salad bowl) 이론으로 논의가 옮겨갈 때도 음식에 비유된 정치학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샐러드볼의 조상격인 비빔밥과 탕평채―다인종, 다문화집단이 대상은 아니었으나―가 있다. 현 정부에서도 지난 8월 여야원내대표 회동 때는 오색비빔밥을, 11월 5일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 회의에선 탕평채를 내놓았지만, 그 음식에 부여된 정치적 의미가 잘 실현되고 있지는 못한 실정이다. 
 
올해 8월 청와대 본관 인왕실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5당 원내대표 오찬 간담회에 제공된 오색비빔밥. 사진/뉴시스
 
‘탕탕평평(蕩蕩平平)’ 탕평채
한때는 영조의 ‘탕평책’에서 ‘탕평채’가 유래되었다는 설이 통용된 적도 있으나, ‘주영하의 음식 100년(20) 탕평채’(경향신문 2011년 7월19일자)에서 주영하 교수는 탕평채에서 탕평책이 유래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여러 역사서들을 토대로 설득력 있게 펼치고 있다. 그가 소개하는 조재삼(1808~1866)의 <송남잡지>(1855년) 속 송인명(1689~1746)의 일화에 따르면, 영조 때 대신 송인명이 가게에서 탕평채 파는 소리를 듣고 사색을 섞어 등용하는 탕평책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유득공(1749~1807)의 <경도잡지>와 홍석모(1781~1857)의 <동국세시기>가 민간에서 즐기는 탕평채를 소개한 것을 보아도, 탕평책에서 탕평채가 유래했다기보다 백성들의 음식인 탕평채에서 지혜를 빌려와 정치에 사용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꽤는 방정맞기도 했거니와
그러나 지친 왕조
새로이 하고자
탕탕평평 탕평책
탕평채로 반찬하여
한여름 수라를 때웠다

그러나 그의 권세가 어찌 역사이런가
패관문학 억누르고
왕권문학 지키려는 반동의 권세 앞이었다

만약 영조 등극 첫 무렵 그대로
그 총명한 젊은 신하들과
한번 크게 떨쳤던들
거기 조선의 새로운 날 열 수 있었으리라

< … >
(‘영조’, 5권)

차린 것은 그닥 없습니다만
많이 드시오
자 어서 드시오

< … >

저 3백년 당쟁에 지친 나라
3백년 당쟁
아직도 그칠 줄 모르는 나라
왕이 즉위하자마자
삼정승
육판서
그밖의 여러 신하 청하여
갖가지 모여
하나를 이루었으니
어서 드시구려

이 음식에는
여러 색깔이 하나를 이루었으니
어서 드시구려
어서 들고
서로 
서로
색깔 원수 노릇 파하고
하나로 된 색깔 없는 나라 이끌어가시구려

< … >

저 아랫녘
왕실 조상의 터 전주에서는
오래전부터 비빔밥이 있어왔으니
적 황 청 백 녹
오색
칠색 비빔밥이 있어왔으니
그것으로
하나를 끝내 이루지 못하였으니

영조의 꿈 딱하셔라
(‘탕평채’, 26권)
 
백성은 안중에 없고 당파 싸움이나 하던 조선시대 대소 신료들이나, 투표만 끝나면 자신의 공약을 잊고 시대착오적인 특권의식에 젖어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현대의 정치인들이나, 본질적으로 별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국정감사장에서 판관 행세를 하며 소리를 지르는 국회의원들을 보거나(그들은 왜 차분하게 논리적으로 따지지 못하는가?), ‘겐세이’, ‘야지’ 같이 국민들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해서 인터넷 검색을 하게 만드는(일본어 학습을 시켜주려는 뜻인가?) 국회의원을 보는 일은 한심함을 넘어 개탄스럽고 서글픈 일이다. 
 
다산이 <목민심서>에서 강조한 목민관의 애민정신과 공렴(公廉), 즉 진정으로 국민을 생각하는 공평하고 청렴한 공직자의 수준과는 한참 동떨어진 정치인들이, 국민을 위해 함께 모이고 ‘어느 쪽에도 치우침 없이 고른’ ‘탕탕평평(蕩蕩平平)’을 실현해 나가기란 예나 지금이나 대단히 어려워 보인다.
 
바람직한 공직자의 지표를 제시한 다산(茶山) 정약용의 목민심서. 사진/뉴시스
 
동파육과 성계육
 
북송의 문장가 소식(1037~1101)의 호를 딴 요리 ‘동파육’(東坡肉)은 소식이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다가 황주(黃州, 황저우)의 단련부사(지방군사보좌관)로 좌천되었을 때 그가 우연히 개발하게 된 것으로 유명하다. ‘본주안치’(本州安置), 즉 그 지역을 벗어날 수 없었던 소식이 황주에서 손수 음식을 해 먹으며 궁핍하게 지낼 때 친구 마정경이 찾아왔다. 친구와 바둑을 두느라 그에게 대접하려고 불 위에 올려놓은 냄비 속 돼지고기를 잊었던 소동파는 뒤늦게 달려가서 보고 오히려 맛있게 변한 돼지고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그 덕분에 돼지고기를 예찬하는 시도 남겼다.
 
후에 그가 항주(杭州, 항저우) 태수로 부임해 갔을 때 서호(西湖)의 둑이 무너져 범람할 위험이 있자 조정에 상소해 서호를 재정비하는데, 이때 백성들이 감사의 표시로 돼지고기를 바쳤다. 소동파가 그 돼지고기를 황주에서 개발한 자신의 요리법으로 요리해 모두와 나누어 먹었는데, 백성들이 그 맛에 감탄해 그의 호인 ‘동파’를 따서 ‘동파육’(동뽀로우)이라 불렀다는 것이 동파육의 유래로 전해진다. 그가 자신의 시에서도 노래하듯이, 당시 부자들은 즐기지 않고 가난한 이들은 요리할 줄 몰랐던 값싸고 맛있는 돼지고기를 백성들과 함께 나누어 먹고 그들이 즐길 수 있게 만든 것은 그의 애민정신이라 할 만하다.
 
똑같이 고기 앞에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붙였는데, 이와는 대조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 ‘성계육’(成桂肉)이다. 삶은 돼지고기를 ‘성계육’으로 부른 것인데, 개성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고 하니 1388년 위화도 회군과 최영 장군의 처형 이후 최영 장군에 대한 그리움과 이성계에 대한 증오의 민심이 반영되어 있다고 하겠다. 
 
옥구군 옥구면 어은리 황새봉 무당 최말동이는
관운장 모시고
해동 최영 장군 모신다

눈알 툭 불거진 최영 장군
들 건너
월출산 염불당 사천왕과 마주한 형국인데
그 최영 장군 앞에
재 올릴 때
큰 도야지 머리 진설한다

저 건너 가난뱅이 절 사천왕도 잡수라고
그쪽으로도
마른 명태 서너 마리 돌려놓는다

장군어른
장군어른
성계육 잡수시고
부디부디 가련한 이 대주
소원을 들어주사이다
안 들어주시면
어찌 섭섭하지 않겠나이까
부디부디
대주 소원을 들어주사이다
성계육 한 점 떼어 잡수시고
대주 소원성취 들어주사이다

< … >

성계육이라
태조 이성계 고깃덩어리라
그렇지 최영 장군 앞에
성계육이 옳도다

옳도다 여기 조선 오백년 밑바닥에 흘러
이성계가 죽인
최영 장군의 원한 서려 있음이여
최영의 고구려 옛땅 회복노선에
이성계의 사대노선 맞서
고토의 원한 서려 있음이여
오백년 백성 도탄의 뜻이 숨어 있음이여

< … >
(‘성계육’, 6권)
 
부정적 민심―아마도 이성계에게 몰락당한 고려의 권문세가들이 퍼뜨렸을―을 표현하는 ‘성계육’도 있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민심의 기대가 담긴 ‘이(李)밥’도 있다. 이성계가 정도전, 조준과 함께 1391년 과전법으로 토지개혁을 실시해 백성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한 것은 이씨, 즉 이성계가 내려준 밥이라는 뜻의 ‘이(李)밥’이라는 표현을 만들어냈다. 물론 백성들이 신진사대부만큼 이밥(쌀밥)을 먹을 수 없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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