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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철

남북 '해빙무드'에 나온 대법원 '사리원 판결'

2018-02-21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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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토마토 최기철 기자]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기점으로 오랜만에 남북화해 무드가 깃들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북한 지명을 한국에서 통용되는 ‘현저한 지리적 명칭’으로 인정해 독점사용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와 주목된다. 이른바 ‘사리원’ 서비스표권 전쟁이다.
 
사리원(沙里院)은 황해도(현 황북) 봉산군의 군청 소재지다. 재령강 유역의 비옥한 재령평야의 중심지로, 농축산물이 유명해 오래 전부터 쌀과 면, 불고기 요리가 유명했다. 
 
이번 사건의 공식적인 출발점은 2015년 8월이다. 선등록 서비스표권자인 ‘사리원면옥’ 주인 김모씨가 ‘사리원불고기’라는 상호로 영업을 해온 라모씨에게 권리침해 금지 통고를 보낸 때다.
 
그러나 사건의 근원적 출발점은 수십년 전이다. 김씨는 사리원면옥이라는 이름으로 대전에서 식당을 열고 불고기와 냉면을 판매하다가 사업을 크게 일으켜 1996년 6월 ‘사리원면옥’을 서비스표로 등록했다. 비슷한 시기에 라씨 역시 서울에서 조모의 고향인 황해도 사리원을 상호로, ‘사리원불고기’ 식당을 운영하면서 미식가들의 입소문을 탔다.
 
김씨는 고유 브랜드라고 자부했던 사리원면옥을 서울로 진출시키려 했다. 하지만 이미 서울에는 사리원불고기가 있는 터라 쉽지 않았다. 김씨가 2015년 8월 라씨에게 서비스표권을 주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씨의 권리 주장을 라씨는 사리원불고기가 사리원면옥의 권리범위에 속하지 않는다는 소극적 권리범위확인심판 제기로 맞받았다. 그러자 김씨는 이를 반박하는 적극적 권리범위확인심판으로 되받았다. 결국 사건이 법정분쟁으로 비화된 것이다.
 
이후 김씨는 2016년 3월 서울중앙지법에 라씨를 상대로 사리원불고기라는 간판과 메뉴를 쓰지 말라는 서비스표권 침해금지 가처분신청을, 라씨는 같은 해 4월 특허심판원에 ‘사리원면옥’이 현저한 지리적 명칭으로 구성된 서비스표에 해당되기 때문에 무효라는 심판을 각각 제기했다.
 
심판은 김씨 승리로 돌아갔다. ‘사리원’이 현저한 지리적 명칭이 아니기 때문에 서비스표가 유효하고, 서울 ‘사리원불고기’는 대전 ‘사리원면옥’의 서비스표권 권리범위에 속한다고 결론이 난 것이다. “현재 남북분단 상황으로 인해 외국 어느 나라보다 왕래가 더 어려운 ‘사리원’은 현저한 지리적 명칭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김씨 주장을 인용한 것이다.
 
라씨가 특허법원으로 사건을 가지고 같지만 역시 같은 판단을 받았다. 특허법원은 2016년 소비자 인식조사에서 사리원을 지리적 명칭으로 인식한다는 응답자 비율이 19.2% 또는 16.5%에 그쳐 사리원은 현저한 지리적 명칭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여기에 서울고법이 김씨의 침해금지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이면서 라씨는 ‘사리원불고기’ 간판을 내렸다.
 
그러나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서비스표 등록일로부터 20년이 지난 뒤에 이루어진 설문 조사결과에 근거한 특허법원 판단은 부당하다”며 “오히려 교과서, 언론보도, 설문조사 등을 비롯해 일반수요자의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사리원’은 현저한 지리적 명칭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고 판시했다.
 
이번 대법원 판결로 ‘사리원’은 냉면과 불고기를 판매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상표 또는 서비스표로 쓸 수 있게 됐다. 2018년 2월 인터넷 포털 검색 기준으로 전국에 ‘사리원’ 상호로 검색되는 식당은 총 66개이다. 포털에 등록하지 않은 영업점까지 포함한다면 그 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사건에서 라씨를 대리한 법무법인 광장의 김운호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대법원이 북한 지명인 ‘사리원’ 상표 또는 서비스표가 현저한 지리적 명칭인지를 판단하면서 현재 남북에 왕래가 자유롭지 않다는 단면적 현상에 고착되지 않고 역사적, 문화적, 교육적, 사회적, 경제적 배경을 전체적으로 고려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최근 상표권 소송에 있어서 수요자의 설문조사 결과를 적극 반영하는 것이 법원의 경향이지만, 20년이라는 기간적 차이가 있는 설문이 수요자의 인식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고 본 대법원 판단 역시 상표법상 큰 의미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대법원 청사. 사진/뉴스토마토
 
최기철 기자 lawc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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