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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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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선언부터 개성공단 중단까지 '남북 경협 30년사'

26년만에 교역규모 150배 급증, 개성공단 폐쇄 이후 역대 최저치로 추락…경협 기업들도 수난

2018-01-1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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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었던 남북관계에 해빙 기류가 감돈다. 살얼음 같던 4강외교 속에서도 대북 대화 기조만은 놓치지 않았던 정부 의지가 국면 대전환의 단초가 됐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신년사를 통해 평창동계올림픽 대표단 파견과 함께 민족자결주의를 꺼내들며 닫혔던 문을 열었다. 미·중의 압박 속에 남한 외에는 출구가 없었다는 지정학적 분석과 함께, 중요한 것은 이를 어떻게 한반도 평화 정착의 마중물로 삼느냐는 현실적 고민도 이어진다. 평창올림픽이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고 이산가족 상봉, 경제협력 등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에 <뉴스토마토>는 분단 이후 민간 차원에서 이뤄진 대북사업의 역사를 돌아보고 과제들을 짚었다.(편집자)
  
[뉴스토마토 최병호 기자]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는 인류 역사를 '도전과 응전'의 연속으로 풀어냈다. 끊임없는 위협과 도전에 맞서 응전을 통해 생존을 모색하는 과정이 인류의 발전사라는 설명이다. 남북 경협이야말로 도전과 응전의 역사다. 대내외 정치·군사·외교 환경 변화에 따라 경협도 춤을 췄다. 예상치 못한 돌발변수로 경협이 중단되는 아픔도 있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도 양측 교역은 1989년 1800만달러에서 2015년 27억1447만달러까지 150배 급증하며 남북관계 개선에 기여했다. 하지만 2016년 2월 개성공단 폐쇄 이후 민간 차원의 대화가 단절되자 경협은 새 도전에 직면했다.
 
남북관계에 협력의 물꼬가 트인 것은 1988년 노태우정부의 '7·7선언'이 직접적 계기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정부는 대결노선 대신 '민족의 자존과 통일·번영'을 추구하기로 했고, 그해 10월 '대북 경제개방 조치'를 발표했다. 7·7선언 직후 우리정부는 삼성물산, 대우상사, 럭키금성(현 LG), 선경(현 SK), 현대종합상사, 쌍용물산, 효성물산 등이 참여하는 '남북 민간교역협의회'를 발족, 민간기업을 활용한 물자교류에 나선다.
 
본격적 경협은 7·7선언의 실무 작업이 마무리된 1992년부터다. 제일모직과 LG패션, 코오롱 등 섬유업계가 북한의 현지업체와 합작, 섬유 위탁가공업을 시작했다. 남한의 자본과 기술력, 북한의 싼 인건비가 결합됐다. 이를 통해 제일모직은 1990년대 중반까지 매년 1500만달러 규모의 매출을 올렸으며, LG패션 300만달러, 코오롱은 30만달러 상당의 매출을 거두는 등 남북 경협의 수혜를 누렸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섬유업계가 직격탄을 맞자 경협도 휘청거렸지만, 2000년대 중반까지는 남북관계 개선의 가교 역할을 해냈다.
 
섬유 위탁가공업의 성과가 가시화되자 삼성과 대우 등 대기업들도 대북사업을 확대한다. 1995년 삼성은 강진구 당시 삼성전기 회장 등 계열사 임원들로 방북 대표단을 구성, 나진·선봉 경제특구를 둘러보고 1998년에는 10년간 10억달러 규모의 투자계획을 내놨다. 그 일환으로 삼성전자는 2000년부터 2009년까지 북한 업체와 소프트웨어 공동개발을 추진했다. 대우는 대우인터내셔널을 중심으로 남포특별시 소재 남포공단에 의류봉제 공장을 지었고, 공단 200만평 부지에 대규모 생산라인을 조성할 계획도 내놨다. 하지만 대우가 외환위기로 그룹이 공중분해되면서 남포공단 사업은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중단된다.
 
 
사진/뉴스토마토
 
경협의 하이라이트는 현대의 금강산 개발 사업이다. 실향민인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은 1990년대 초부터 금강산 사업을 구상했으나 경협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대선에 관심이 많았다. 14대 대선에 패배한 정 회장이 경영에 복귀하고, 97년 대선에서 승리한 DJ가 햇볕정책을 추진하자 현대는 남북 경협의 선봉에 선다. 정 회장은 1998년 6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모두 1001마리의 소떼를 이끌고 방북, 김정은 국방위원장과 면담해 금강산 사업을 성사시켰다. 11월18일은 강원도 동해항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첫 배가 출항한, 전쟁 후 50여년 만에 민간인의 대북 길이 열린 역사적 순간이었다. 현대는 1999년 2월 대북사업을 전담할 현대아산을 설립, 이후 개성공단 개발과 이산가족 상봉 등의 실무를 맡으며 경협의 상징이 됐다.
 
참여정부까지 이어진 햇볕정책과 두 번의 정상회담 등으로 한반도에 평화 기류가 정착되자, 재계에서도 대북사업이 새 먹거리로 부상했다. 기업들은 대북사업팀 구성 등의 조직개편을 서둘렀고, 대한상공회의소와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단체들도 대북사업을 독려했다. 언론은 경협을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이끌 대안으로 부각시켰다. 2005년 3월부터 입주·가동에 들어간 개성공단은 이 같은 노력의 결실이었다. 당시 경협에 나선 주요 기업으로는 현대 외에도 KT(금강산 통신사업, 정보통신기술 공동연구), 우리은행·농협(지점 운영), E1(액화석유가스 공급), 금호산업(개성공단 개발) 등이 있다. 실제 사업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으나 SK와 현대차 등도 사업성을 검토, 경협 가능성을 저울질했다.
 
17대 대선을 통해 보수정권이 들어서면서 정부의 대북 기조가 강경노선으로 전환, 경협의 양상도 돌변한다. 2008년 7월에는 금강산을 관광하던 박왕자씨가 북한군에 피살되며 금강산 관광이 중단됐다. 2년 뒤 천안함 사태로 정부는 5·24조치를 발표, 개성공단을 제외한 남북교역을 모두 중단했다. 민간인 방북과 대북 신규투자도 불허되면서 경협은 급속히 냉각된다. 삼성의 10억달러 투자와 대북 섬유업 등도 이 시기를 즈음해 중단된다. 그나마 개성공단이 경협의 명맥을 이었다. 하지만 2016년 2월 박근혜정부는 북한의 4차 핵실험에 대한 대응으로 개성공단마저 전면 중단했다. 
 
통일부에 따르면 1989년 1800만달러에서 시작한 남북 경협 규모는 2015년 27억1447만달러까지 급증했다. 하지만 개성공단이 중단된 2016년 3억3256만달러로 급감했으며, 2017년(11월 누적 기준)에는 91만달러로 역대 최저치로 떨어졌다. 
 
최병호 기자 choib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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