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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협

(사회책임)불확실성시대에 ‘확신의 영웅들’

2017-12-18 08:00

조회수 :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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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발의 총상을 입은 북한병사 오청성씨가 기적같이 살아났다. 사경을 헤메던 그가 급속히 회복된 배경에는 25세라는 나이도 있지만,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꼭 한번 살아보겠다는 의지가 작용했을 것이다. 혈투를 벌이며 사신(死神)을 막아낸 이국종 교수의 책임감과 만난 것도 행운이었다.
 
불과 1년 전이었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주말마다 수백만명이 운집하는 촛불시위가 이어졌었다. 국정농단의 진상이 속속 밝혀졌지만 책임자들을 응징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했고, 대통령 탄핵이 어떻게 될 지도 불투명했다. 국정원 댓글공작 사건의 수사팀장을 맡았다가 좌천된 윤석열 검사는 “국정원을 수사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토로한 바 있다.
 
공영방송은 시청료와 광고를 먹어치우는 ‘식충이’로 전락한 지 오래다. MBC 기자, PD, 아나운서들이 해직되거나 ‘신천교육대’로 쫓겨났다. 그러나 반지성적 횡포가 공영방송을 지키겠다는 의기마저 꺾지는 못했다. 최승호 PD는 해직 2000일이 넘어서 사장이 돼 돌아왔다.
 
삼성물산의 합병과정에서 국민연금의 공공성과 책임성은 정치권력과 재벌의 사익 앞에 속절없이 무너졌고, 가입자의 이익은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국민연금은 옥시레킷벤키저를 비롯한 가습기살균제 관련기업에 엄청난 거액을 투자하면서도 아무런 기업관여(Engagement)를 하지 않았다.
 
세월호참사, 가습기살균제, 국정원 선거개입, 국정농단 등은 정부, 기업, 언론, 개인이 각자의 책임을 다하는 ‘조직화된 책임성’이 낮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시민들이 반격에 나섰다. 지난해 촛불대행진은 주저하는 정치권을 제치고 시민들이 확신의 영웅처럼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었다. 불과 1년만에 사회적 책임성이 높아지는 징후가 역력해지는 것은 작은 사람들이 모여서, 작은 단체들이 힘을 합쳐 분투했기 때문이다.
 
부정청탁금지법이 시행된 것도 불과 1년 전이었다. 그런데 벌써부터 정부 주도로 농축수산품 상한액을 10만원으로 올리자는 교란행위가 나타나고 있다. 이 법의 제정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은 “금액에 의미를 두면 국민들에게 그만큼 허용한다는 생각을 심어줄 수가 있기 때문에 일체 받지 말라는 것으로 인식시켜야 한다”고 정곡을 찔렀다.
 
내년부터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를 도입하게 된 것도 시민사회와 국회에서 줄기찬 노력이 이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그리고 공기업이 사회적 책임(CSR)을 다하고, 국민연금을 비롯한 투자자가 사회책임투자(SRI)를 활성화하고, 소비자가 윤리적 소비에 참여하고, 언론 및 포털·노조·대학·의료기관·종교단체 등이 어울려 ‘사회책임의 선순환 생태계’를 구축해야 ‘조직화된 책임성’이 제고될 수 있다.
 
정치적 맥락에서는 총선과 대선을 거치면서 양당체제의 적대적 공생구조에 균열이 생기면서 다당제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확신에 찬 사람들이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낙선의 길로 뚜벅 뚜벅 나아간 사람들은 조소를 받기 마련이다.
 
40년 전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현대를 불확실성시대(The Age of Uncertainty)라고 규정했다. 이런 시대일수록 공공의 가치를 위해 책임을 다하는 ‘확신의 영웅들’을 갈구하게 된다.
미국 FDA의 정신적 지주가 된 고 프랜시스 켈시 여사도 대기업과 관료조직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기형아 발생의 비극을 막아낸 확신의 영웅이었다. 이국종 교수, 윤석열 검사, 김영란 전 대법관, 최승호 PD 등도 자신의 소임에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확신의 영웅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비자는 인간의 본성을 성악호리(性惡好利, 근본적으로 악하고 이익을 좇는다)에서 찾았지만, <인간 본성의 역사>에 등장하는 인류지성의 논변에는 때론 직관적 호출로서, 때론 도덕적 명령으로서 인간의 우애에 대한 희원이 점철돼 있다.
 
지난 1년의 격동은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책임을 돌아보기에 부족하지 않은 경험이자 교훈이었다. 사회 곳곳에서 ‘확신의 영웅들’이 앞이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진격했다. 그 분투와 노고를 물거품으로 만들려는 퇴행에 단호히 맞서야 한다.
 
김병규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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