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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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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의세상읽기)사서가 먼저다

2017-09-08 06:00

조회수 : 28,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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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작은 도시 본에 살 때 내가 가장 즐겨 찾던 곳은 대학 본관 앞에 있던는 부비에르 서점이었다. 부비에르 서점은 외벽을 백화점 쇼윈도처럼 꾸며 책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서점 안에는 분야별로 사서들이 있어서 군데군데에서 책을 읽는다. 그들에게 다가가 어떤 주제의 책을 찾는다고 하면 책을 골라주는데 은근히 고객과 이야기를 많이 한다. 고객의 지적 수준과 필요에 따라 맞는 책을 권하는 것이다. 서점의 사서와 몇 달 만에 친구가 되었다. 길에서 만나면 "아모스 오즈의 책이 한저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네가 좋아할 것 같던데. 오후에 들러봐."라고 말할 정도가 됐다.
 
물론 도서관도 좋았다. 어느 날 도서관에서 과학 잡지를 뒤적이다가 "지난 천 년에는 모두 며칠이나 있었는가?"라는 퀴즈를 보았다. 윤년 규칙과 역사만 알면 쉽게 풀 수 있는 문제인데 내 답은 자그마치 열흘이나 틀렸다. 왜 틀렸을까? 시립도서관에 갔다. 개가식 서가에서 달력에 관한 책을 한 권 찾아 읽었지만 궁금증은 끝이 없었다. 다행히 내 궁금증을 풀어줄 책은 도서관에 다 있었다.
 
달력에 관한 책은 몇 권만 읽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가 달력에 관심이 있는 것을 눈치 챈 사서가 어느 날부터인가 나를 위해 달력에 관한 책을 찾아놓고 나를 기다렸다. 본에 없는 책은 다른 도시에서 대출해주었다. 사서 등쌀에 나는 달력에 관한 책을 계속 읽어야 했고 결국 『달력과 권력』이란 책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내 인생의 행로가 달라졌다. 독일 도서관이 내 삶을 바꾼 셈이다.
 
독일에는 시립도서관이 정말 많다. 그 당시 한국과 비교하니 한없이 부러웠다. 그런데 웬걸! 귀국해 보니 우리나라에도 그 사이에 도서관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내가 어릴 때는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도서관은 2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는 우리 집에서 반경 2킬로미터 안에 두 개의 커다란 시립도서관이 있을 정도다.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나라에는 도서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라는 말이 거의 들리지 않는다. 공공도서관만 해도 작년 말 기준으로 989개에 달했다. 문체부가 작년에 발표한 '제2차 도서관발전종합계획'도 공공도서관 1천 개, 총 장서 수 1억 권 돌파를 목표로 제시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도종환 문체부 장관은 지난 7월 한 인터뷰에서 공공도서관을 임기 내에 300개 더 신설하겠다고 밝혔다.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도서관이란 무엇일까? 도서관을 '건물'이라고 대답하는 독자는 설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도서관을 '책'이라고 대답하는 독자는 매우 많을 것이다. 맞다. 근사한 건물보다 책이 더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나는 도서관은 '사서'라고 생각한다. 사서는 책을 빌려주고 받은 책을 닦아서 서가에 꽂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사서는 책과 독자를 연결해 주는 지식 큐레이터다. 근사한 현대식 도서관 건물에 수만 권의 책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걸 다 읽을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게 맞는 책을 찾아 권하고 내 독서 인생을 이끌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들이 바로 사서다. 사서야말로 도서관의 핵심역량이자 생명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사서가 몇 명이나 있을까? 도서관 사서는 면적과 장서에 따라서 조정된다. 작년 말 기준으로 공공도서관의 법정 사서 인원은 2만 3222명이다. 공공도서관마다 평균 23명의 사서가 있어야 한다. 도서관에서 눈을 아무 데다 돌리면 한눈에 들어오는 사서가 있어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숫자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그런 경험을 할 수 없다. 정원은 정원일 뿐이다. 실제 배치된 인원은 4238명. 도서관 한 곳당 네 명에 불과하다. 정부가 규정을 지키고 있지 않는 것이다. 사서가 나서서 이용자를 도와주기는커녕 이용자가 도움을 청할 사서를 찾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적폐다.
 
적폐 청산을 외치는 새 정부가 들어섰으니 이제 올바로 바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거꾸로 가고 있다. 문체부는 공공도서관에 사서 3명을 반드시 두기로 했다. 대신 면적과 장서에 따라 충원해야 한다는 기준은 없애기로 했다. 규정이 비현실적이라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다. 그런데 규정이 있어도 채우지 못하고 있는 정원은 어떻게 될까? 몇 년 후 한국 공공도서관의 사서는 3천 명 수준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 문체부는 방침을 철회해야 한다.
 
한국의 출판과 도서관 생태계는 거의 무너졌다. 지식 허브가 사라지고 있다. 도서관은 조금 나중에 지어도 좋으니 사서를 먼저 충원하자. 세상을 바꾸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서가 먼저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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