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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준

(피플)"외주 그만!…콘텐츠 구매방식으로 바꿔야"

최영기 위원장 "갑을병정 수직적 하도급 구조가 방송환경 지배"

2017-09-04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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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토마토 박현준 기자] 지난 7월19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비보가 전해졌다. 박환성 PD와 김광일 PD가 7월14일 오후 EBS '다큐프라임-야수와 방주'의 제작을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촬영을 하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이다. 고 박PD와 고 김PD는 교통사고로 숨졌지만 한국독립PD협회는 이를 '사회적 타살'로 규정했다.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라 부족한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무리하게 촬영을 진행하다가 사고가 났다는 것이 협회의 입장이다.
 
두 PD의 안타까운 죽음을 계기로 외주제작자들의 열악한 제작 환경이 개선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방송을 송출할 수 있는 플랫폼을 갖춘 방송사는 업계에서 갑으로 꼽힌다. 방송사 아래로 콘텐츠를 공급하는 외주제작사, 개인적으로 프로그램을 수주하는 독립PD와 주요 방송 스태프들까지 갑-을-병-정으로 이어지는 수직적 하도급 구조다. 한국독립PD협회는 지난 8월 '방송사 불공정행위 청산과 제도 개혁을 위한 특별위원회'(이하 방불특위)를 꾸리고 외주 제작 환경의 불공정성을 알리고 개선을 위한 활동에 돌입했다. 방불특위를 이끌고 있는 최영기 방불특위원장으로부터 제작 환경 개선을 위한 방안에 대해 들었다.
 
최영기 방불특위원장이 지난 8월14일 서울 양천구 방송회관에서 열린 '방송 외주제작 생태계 복원 공동행동 선언'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한국독립PD협회
 
"외주라는 말부터 바꿔야죠. 방송사가 발주하고 이를 수주하는 것이 아니라 방송사가 필요한 콘텐츠를 구매하는 방식을 도입해야 합니다".
 
최 위원장은 지난 1987년 아르바이트로 방송 콘텐츠 제작을 시작해 독립PD로만 30년째다. 방송 콘텐츠를 숱하게 제작했고 방송사와 함께 일했다. 하지만 이번 두 후배들의 사망 사건을 겪으면서 이제는 바꿔야겠다고 결심했다.
 
"방송사가 필요한 콘텐츠 사야…방송 종사자 권리 법제화"
 
현재 방송 시장은 콘텐츠를 제작하는 제작사와 방송을 내보내는 방송사간의 불균형이 심각하다. 그나마 방송사가 지상파 3사에 종합편성채널(종편)과 케이블 채널까지 더해졌지만 외주 제작사가 훨씬 많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등록된 곳만 1400여곳이다. 방송 콘텐츠를 만드는 곳은 많고 이를 대중에게 알릴 곳은 소수다. 방송사들이 업계에서 이른바 '갑'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방송사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방송 콘텐츠 제작 발주를 낸다. 제작사들이 경쟁해 수주하는 방식이다. 제작사들이 만든 콘텐츠의 저작권도 방송사들이 가져가는 경우가 많다. 방송사가 절대 강자이다 보니 콘텐츠를 제작하기 전 제대로 된 업무 범위와 예산에 대해서도 정확히 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 방송사 관계자는 "제작사들이 너무 많은 공급 과잉 상태이다 보니 제작 후에 대가를 정산하는 경우도 있다"며 "이는 바꿔야 할 관행"이라고 말했다.
 
최 위원장은 더 이상 수주가 아닌 방송사들이 제작사들의 콘텐츠를 구매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애초에 제작사가 만든 콘텐츠를 방송사들이 구매한다면 다양한 계약 형태가 나올 수 있다"며 "계약 규모에 따라 방영권이나 기간 등을 다양하게 설정해 권리를 공정하게 나누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 위원장은 독립PD뿐만 아니라 작가·조명·음향 등 방송 업계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의 제작 환경 개선을 위해 법제화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정부가 바뀌더라도 지속될 수 있도록 법으로 근로자들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의미다. 최 위원장은 "방송법과 근로기준법에는 방송 업계 종사자들에 대한 것이 명시돼있지 않다"며 "방송 종사자들의 근로 환경이 조금이나마 나아질 수 있도록 법제화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법제화를 당장 하는 것은 쉽지 않다. 협회는 중장기 과제로 놓고 국회의원들과 협의할 계획이다.
 
최영기 방불특위원장이 방송 콘텐츠를 촬영하고 있다. 사진/한국독립PD협회
 
"방통위·문체부 구체적이고 정확한 실태조사 기대"
 
최 위원장은 법제화의 첫 걸음으로 제대로 된 실태조사를 꼽았다. 상황이 어떤지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알아야 개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송통신위원회와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달부터 방송 외주 제작 환경 실태 조사에 들어갔다. 방통위가 지상파·케이블 방송사를, 문체부가 외주제작사와 독립PD 등을 조사하는 방식이다. 
 
최 위원장은 "근로자들의 임금 수준과 방송사들의 갑질 사례 등 외주제작과 관련된 전반적인 실태조사를 1차로 해야 한다"며 "어느 정도의 조건과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가를 정확하게 파악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개선 방안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효성 방통위원장은 지난달 30일 최 위원장을 비롯해 외주제작사 관련 협회 대표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협회 대표들은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 말하며 제대로 된 공론화의 장이 필요하다고 요구했고 이 위원장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 위원장은 "9월 하순경에 독립PD들을 비롯한 외주제작사의 제작환경 문제를 공식적으로 논의하는 토론회를 열 것"이라며 "갑-을-병-정으로 이어지는 방송사·외주사·독립PD 등의 이야기를 듣고 방통위가 해야 할 일을 찾는 작업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협회는 이 위원장과 인연도 있다. 협회가 지난 2009년 성공회대 사회문화연구소와 함께 방송 종사자들의 제작 환경 실태조사를 벌이며 개최한 심포지엄에 당시 교수였던 이 위원장이 참석한 바 있다. 최 위원장은 "이 위원장님은 철학이 사회 정의를 지키는 쪽에 있는 분"이라며 "그런 점에서 이번 방송 업계 종사자와의 간담회는 의미가 깊다"고 말했다.
 
"공급과잉 출구 뚫어야…외주 전문 채널 대안"
 
외주 전문 채널을 도입해 제작사들의 매출 통로를 넓히는 것이 공급과잉 해결책 중 하나로 꼽힌다. 영국은 지상파 방송에 대한 외주 의무 비율을 전면적으로 부과하기 전부터 CH4·CH5 등 외주 전문 채널을 도입했다. 지상파 방송사 관계자는 "영국은 외주 전문 채널로 외주 제작사들이 경쟁력을 쌓을 수 있는 시간적·재정적 기회를 확보할 수 있었다"며 "우리나라는 기존 방송사들에게 외주제작 프로그램을 편성하도록 강제하는 방식만을 사용했기 때문에 방송사와 외주제작사 간의 대립적인 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국내 방송 시장에는 지난 1991년 외주 의무 편성 비율제도가 도입됐다. 방송사 프로그램의 일정 비율 이상을 자체 제작이 아닌 외주 제작사에게 맡기도록 한 제도다. 외주 제작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다. 도입 초기 총 방송시간의 5% 미만이었던 의무 비율은 최대 40%까지 늘었다. 지상파 방송사 관계자는 "외주 제작사의 방송 제작 자립도가 낮고 한정된 물량으로 경쟁을 벌이다보니 공급자의 협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현준 기자 pama8@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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