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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69화)어느 독립운동가들의 마지막 삶

“오직 세월만이 그의 오랜 동지로”

2017-06-1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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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독립운동가와 한국전쟁·베트남전쟁 참전용사뿐만 아니라 파독광부·간호사, 산업화 시기 청계천의 여성노동자들을 언급한 것은 많은 국민들에게 감동으로 회자되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현충일이라는 특성과 전 국민을 포용하려는 이유 때문이겠으나―당시 권력이 ‘애국’의 이름으로 강요했던 그들의 희생을 다시금 ‘애국’의 관점에서만 강조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이 가려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리는 우리들은 ‘조국경제’를 위해 내몰린 베트남 참전용사의 희생을 잊어서도 안되지만 우리의 군(軍)이 베트남 국민들에게 준 고통도 잊어서도 안된다.
 
국권피탈의 기억
국가보훈처가 9년여 만에 다시 장관급 기구로 격상될 예정이다. “국가유공자와 보훈대상자, 그 가족이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대통령의 의지가 실현되어 그동안 홀대를 받아온 이들이 정당한 보상과 대우를 받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동안 참으로 얼마나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그 후손들이 외면당해왔고, 6.25 참전 상이군인들과 고엽제 후유(의)증에 시달리는 월남전 참전 군인들이 ‘무등급’ 판정에 절망해야 했던가. 국가에 헌신한 후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위로받고 존중되는 나라, 진정한 보훈(報勳)이 이루어지는 나라로 우리도 거듭날 것인가?
 
이 ‘보훈의 달’에 우리는 또 하나의 역사, 6월항쟁을 기념했다. 민주화를 위한 이 시민투쟁이 기념되듯이, 바로 뒤이어 터져 나왔던 1987년 7·8월의 노동자투쟁도 역사의 조명을 제대로 받을 날이 오기를. 분단과 독재상황에 지배받는 한반도의 현대사가 암울하게 느껴질 때 위로삼아 스스로에게 반문하던 말이 있다. “그래도 나라가 있다는 게 어딘가!” 그래서―이는 비교할 문제가 물론 아니나―열악한 조건 속에서 반독재민주화투쟁을 하다가 희생된 이들을 생각할 때면, 매순간 목숨을 걸고 항일독립투쟁을 해야 했던 이들을 떠올리게 된다.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지난 6일 오전 서울 강동구 중앙보훈병원 유공자 병실을 방문, 황의선 애국지사(93세, 6.25참전유공자, 무공수훈자)와 악수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평양에서 크질오르다까지
<만인보>에는 홍범도(1868~1943) 장군을 주인공으로 한 두 편의 시가 같은 제목으로 등장한다.
 
외금강 신계사
사미승 등명(燈明)
 
나뭇짐 벌떡 일어서면
저 비로봉 영랑봉 들도 눈을 껌벅여온다
 
어제의 고아
내일의 혁명가 홍범도의 법명 등명
신계사 앞
신계천 물소리 잠들었다
 
저 청산리
저 씨베리아
저 대륙 아득한 황무지 타슈켄트의 아비였다
< … >
(‘사미승 등명’, 18권)
 
의병활동을 시작하기 전까지의 그의 생애는 또 다른 ‘사미승 등명’에서 보다 상세히 묘사되고 있다.
 
평안도 후창 후창강 강물소리 힘차다
바람소리 힘차다
아기 태어난 지 이레 만에
어머니는 숨졌다
암죽 먹었다
여덟살에 아버지 숨졌다
열살에 머슴이 되었다
열다섯살에
열일곱살이라 나이 올려
평양 군대에 들어갔다
 
머슴 때는 통소를 불었으나
군대에서는 나팔수였다
총을 잘 쏘았다
명중
또 명중이었다
 
부패상관 두들겨패고 뛰었다
탈영
삯전 삼킨 공장주인 죽이고 뛰었다
쫓기는 살인범
떠돌다
묘향산 보현사 불목하니가 되었다
 
한 뜻있는 비구의 소개로
금강산 신계사로 갔다
지담대사 제자가 되어
법명 등명(燈明)
세상의 등불 되라 했다
 
새 속명도
범도라 받았다
큰뜻을 도모하라 했다
 
신계사 암자 사미니와
눈맞았다
그녀 옥녀와
물 떠놓고
부부가 되어 떠났다
 
큰 운명이 시작되었다
< … >
 
(‘사미승 등명’, 16권)
 
일찍 고아가 되어 머슴, 나팔수, 제지공 등을 거치며 불의한 상관과 공장주인을 두고 보지 못했던 그가, 한때 사미승 등명이 되어 이순신 장군의 후손인 지담 대사를 시봉하며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후 그는 광산 노동자로도 잠시 일했으나 출중한 사격술 덕분에 오랫동안 산포수 생활을 하게 된다. 1907년 함경도 갑산의 산포수들을 중심으로 의병대를 조직해 항일투쟁에 들어선 이후, 전투마다 승승장구해 일본군이 ‘나는(飛) 장군(將軍)’이라 불렀다는 이 전설적인 의병장은, 일본군에 볼모로 잡혀 당당히 맞서던 아내가 고문으로 옥사하고 그 얼마 후 장남마저 전사하는 비극에도 불구하고, 무장투쟁을 지속해 1920년 그 유명한 봉오동전투의 역사를 쓰게 된다.
 
참고로, 봉오동전투에서 빠뜨릴 수 없는 또 한 명의 인물이 있는데, 당시 북로독군부 참모장을 맡고 있던 최운산 장군(1885~1945)이다. 중국 옌지(연길·延吉)에서 태어난 그는 1910년 형 최진동, 동생 최치흥과 함께 만주로 이주해 간도 지역의 황무지였던 봉오동을 동포들과 함께 개간하고 '신한촌'(新韓村)을 건설했다. 또한 봉오동사관학교를 설립해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했는데, 그는 자신이 모은 전 재산을 항일무장독립투쟁을 위해 사용함으로써―투쟁기지 건설, 독립군의 식량과 군복, 무기 공급 등―무장부대인 군무도독부, 북로독군부, 북로군정서가 창설될 때에도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무장독립군들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 최운산 형제들의 군무도독부를 통합해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라는 독립군 연합부대를 조직했는데, 봉오동전투의 성공에는 이렇게 철저한 준비가 있었던 셈이다.
 
봉오동전투(1920년 6월6~7일)에 이어 몇 달 뒤 청산리전투(1920년 10월21~26일)에서도 김좌진·최진동부대와 함께 일본군을 격파한 홍범도부대는 일본의 간도대학살(경신참변)로 인해 많은 독립군들처럼 시베리아로 이동해갔고, 1921년 6월27일 러시아령 아무르 주 스바보드늬(‘자유로운’이라는 뜻의 시 이름, 구 알렉세예프스크)에서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겪게 된다. 적군과 백군이 내전 중이던 소련에서 적군―백군은 일본과 연계되어 있었으므로―을 돕고 단합된 힘으로 대일항전을 전개하기 위해 자유시에 총집결한 독립군 부대들은, 군통수권 장악을 둘러싸고 벌어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사이의 갈등에 코민테른과 소련 적군이 개입함으로써 참변을 맞게 된다. 대한독립군단의 소수파인 이르쿠츠크파의 편을 든 소련의 적군은 자유시에 집결한 대한독립군단의 부대들 중 투항하지 않은 독립군들을 대량사살하고 생존자들을 포로로 잡아 수용소에 보내는데, 이는 조선독립군 세력을 와해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자유시 참변이 더욱 비통한 이유는, 이 비극이 독립을 위해 일본군과 싸우다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독립군 내부의 갈등,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극동공화국정부의 정책 등이 얽혀 독립군이 사살되고 조직이 파괴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홍범도군대는 이 사건으로 인해 러시아 적군에 편입되었고 홍범도 장군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를 당한다(앞서 소개한 첫 번째 시에 “타슈켄트의 아비”라는 표현이 있어 우즈베키스탄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여천(汝千) 홍범도(洪範圖, 시에서 언급한 새 속명은 範道). 평양에서 태어나 만주로, 시베리아로, 온몸과 마음을 독립운동에 바쳤던 전설의 용장(勇將)은 카자흐스탄의 황무지에서 움막생활을 하다가 1938년 크질오르다(현 키질로르다)로 이주해 고려인극장의 수위로, 광복을 2년 앞두고 마지막 삶을 마감한다. 여천 스스로 원해서 고려인극장의 수위로 근무하였다고 하니, 노녀의 나이에도 마지막까지 동포들 옆에서 그들을 지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한편, 1943년 10월 25일 그가 눈을 감기 전 벗들을 불러 돼지를 잡아 대접했다고 하니, 이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삶이 고난의 연속이었을지언정, 쓸쓸하게만 끝났다고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될 일이다.
 
봉오동, 청산리 전투 등을 승리로 이끈 홍범도 장군의 동상.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지역에 있는 이 묘역은 95년에 설립된 ‘홍범도 펀드’가 관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신림동 판자촌의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처럼 이름 알려진 독립군 대장이 아니라 그 대장을 따라, 또한 온몸과 온 마음을 던져 싸웠던 수많은 독립군 병사들을 기억하고자 한다. 그들을 대표하여 여기 고은 시인이 소개하는 한 인물, “진짜 애국자”가 있다.
 
나이 90세로 살아 있었다
만주벌판 독립군 전사 이우석
< … >
관악산 밑 어느 구석방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
한번도 빛나는 영예 받아 본 적 없다
 
열여섯살로 독립군 전사가 되어
북로군정서 서일 휘하
블라지보스또끄에서
북간도 여기저기 무기수송 임무를 맡았다
 
전우끼리 서로 바지저고리 나눠입고
사흘 굶어도
밀전병 한 조각도 나눠먹고
청산리 1백여리 긴 골짜기
어랑촌 백운평에서
일본군 나남 14사단 신예병력과 맞서
그는 백병전 전사였다
 
체코총 들고 싸우다가 살아나
전우들 다 죽어갔는데
그는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굵직굵직 주름살 패어나
오직 세월만이 그의 오랜 동지로
서울의 한 빈민굴 구석방
호호 추위에 곱은 손 비비며 살아 있었다
 
이것이 진짜 애국자이고 독립운동가였다
싸운 것 몇천배로 받아먹지 않는
(‘이우석’, 13권)
 
시에서 언급하듯이, 이우석(1896~1994) 선생은 서일(1881~1921) 장군의 북로군정서에서 소속되어 무기 수송 임무를 수행했고, 4중대 4소대 4분대장으로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나 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포로수용소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해야 했던 그는, 이후 포로수용소를 탈출해 만주로 돌아가 다시 독립운동을 하다가 농사를 지으며 해방을 맞게 된다. 1947년 남한으로 귀국한 그는 생계에 시달리며 고단한 삶을 연명해야 했으나, 그를 더욱 괴롭힌 것은 한일협정을 지켜봐야 했다는 점일 것이다. 18년 후 그에게 주어진 보상은 오만천원의 연금으로, 신림동 난곡 철거민촌에서 노부부는 남편의 막노동과 아내의 파출부 일로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의 고결한 신념과 열정어린 투쟁의 삶은 그가 인생의 마지막에 담담하게 써내려간 수기에 소중히 담겨 있다.
 
만주벌 독립운동가로 마지막 생존자이셨던 선생께서 떠나신 지 이십삼 년, 이우석 옹을 그린 또 다른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민병일 시 이지상 곡)이 들려주는 노래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만주벌판의 독립군 병사들이 우리에게 달려오리라.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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