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기자
닫기
최병호

choibh@etomato.com

최병호 기자입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 10년…현실은 '법집행 불복'

재벌은 법보다 높다? 공정위 조사 방해만 24건…경제검찰 위상 회복 명분으로

2017-05-23 07:00

조회수 : 3,090

크게 작게
URL 프린트 페이스북
[뉴스토마토 최병호 기자] 이명박·박근혜정부가 규제 철폐를 통한 '비즈니스 프렌들리'만 강조한 나머지, 재계가 정부의 법 집행과 행정권을 등한시하는 게 관행처럼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현대·기아차가 정부의 리콜 명령을 거부한 데 이어 현대제철은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방해해 과태료 처분을 받았다. 스스로 규제 사각지대로 빠지면서 새 정부의 재벌개혁 필요성도 한층 수위가 높아졌다.
 
지난 12일 국토교통부는 현대·기아차에 12개 차종 23만8000대에 대한 강제리콜을 명령했다. 앞서 국토부는 지난 3월과 4월 해당 차종의 리콜을 권고했으나, 회사가 이의를 제기하고 리콜을 수용하지 않으면서 지난 8일에는 청문회까지 열렸다. 당시 현대·기아차는 "리콜 이유로 언급된 결함이 안전운행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정부가 리콜제를 시행한 후 기업이 자발적 리콜을 따르지 않아 강제리콜 명령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7일에는 현대제철이 공정위 조사를 조직적으로 방해한 것으로 드러나 총 3억12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 받았다. 공정위는 현대제철이 공정거래법을 위반한 혐의로 지난해 12월과 올 2월 현대제철에 대한 현장조사를 진행했지만 사측이 사내 이메일과 전산 자료 등을 삭제했으며, 직원들의 외부 저장장치(USB) 승인 현황을 은닉했고, 직원 11명이 보유한 USB의 자료 복사 요청에는 모두 제출을 거부했다.
 
재계가 정부의 법 집행에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공정위에 따르면,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기업이 공정위의 조사를 방해하거나 자료 제출을 거부해 경고 이상을 받은 건수는 총 24건으로 연평균 2.6건이었다. 이명박정부 5년간 12건이었던 건수는 박근혜정부 4년간 12건에 달해 점차 기업이 정부의 법 집행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특히 지난해만 7건으로 지난 9년간 최다를 기록했다. 공정위 처분을 수용하지 않고 행정소송을 제기한 비율도 매년 증가, 2008년 7.6%에서 지난해 15.7%로 2배 이상 늘었다.
 
2011년에는 공정위가 삼성전자의 휴대폰 유통 불공정행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을 찾았다가 출입을 통제 당했고, 그 사이 컴퓨터에 있던 증거자료는 사라졌으며, 조사대상 부서의 책임자는 주차장에 숨어있으면서 공정위에는 "서울에 있다"고 거짓말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공정위는 삼성전자에 4억원의 과태료를 부과했다. 2000년 이후 삼성전자가 공정위 조사를 방해한 것은 3차례나 됐다. 같은 해 LG전자도 공정위 조사를 방해, 8500만원의 과태료를 물어야 했다.
 
2015년에는 롯데가 공정위에 허위보고를 해 5억73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 받았다. 당시는 롯데가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그룹의 해외 계열사 현황과 지배구조가 사회적 이슈로 부상하던 시기였다. 이에 공정위는 롯데에 자료 제출을 요구했지만 롯데는 4개 계열사를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고, 지주사인 '광윤사' 등 16개 해외 계열사가 소유한 지분도 허위로 기재했다. 2016년에는 현대그룹이 공정위에 계열사를 누락 보고했으며, 올해도 신세계그룹이 신세계와 이마트, 신세계푸드 등 3개사에 대한 이명희 회장의 차명 주식을 보고하지 않아 과태료를 부과 받았다.
 
방송통신위원회도 기업들의 비협조에 시달리고 있다. 2015년 방통위는 SK텔레콤의 휴대폰 보조금 과다지급 관련 조사를 진행했는데, 일부 유통점에서 조사를 거부하고 전산망에서 페이백 자료를 삭제하는 등 조사를 방해했다. 방통위는 SK텔레콤에 '영업정지 7일'을 부과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이 되진 못했다. 지난해에는 LG유플러스의 단말기유통법 위반 사실을 현장 조사하려 했지만 LG 측이 방통위의 통보가 법적인 절차에 따라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조사를 완강히 거부하는 등 비슷한 사례가 이어졌다. 결국 방통위는 재절차를 밟아 조사에 나섰지만, 조사를 거부한 LG유플러스 임직원에게 2250만원의 과태료만 물려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그럼에도 재계는 새 정부의 재벌개혁 방침과 공정위의 기능 강화 등에는 반대만 내세워 "권리만 챙기려 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상법 개정안에 대해 "'도둑 잡으려 야간통행을 전면금지하는 격'으로 실효성은 낮고 부작용만 우려된다"며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기업하기 가장 힘든 환경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정위의 조사국 부활 등 역할 강화에 대해서도 재계는 그간의 비협조는 생각지 않고 벌써부터 우려의 목소리만 내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공정위 관계자는 "현행법상 기업을 상대로 한 공정위 조사는 강제조사가 아니라 기업의 동의와 협조를 구해야 하는 임의조사로, 기업이 조사를 방해하면 제대로 대처를 못했다"며 "올해 공정거래법을 개정, 10월부터는 조사 거부와 방해에 형벌과 이행 강제금을 부과할 수 있게 했고, 앞으로도 더 강한 제재 수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때마침 재벌 저격수로 불리는 김상조 한성대 교수가 새 정부 초대 위원장에 내정되면서 고강도의 제재를 예고했다.
 
정치권에서도 정부에 협조하지 않는 기업의 태도에 경종을 울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새 정부 출범 이후 첫 국회인 6월 임시회에서는 재벌개혁을 놓고 여야 간 치열한 논쟁이 예상된다. 공정위에 압수·수색권을 부여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발의한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강력한 재벌개혁을 위해 공정위에 강제조사권을 주고 기업집단국도 신설, 경제검찰의 위상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 여권 내에서도 바른정당을 중심으로 "재벌이 법 위에 존재하는 행태만큼은 공정한 시장경제를 위해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최병호 기자 choibh@etomato.com
 
  • 최병호

최병호 기자입니다.

  • 뉴스카페
  • email
  • fac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