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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66화)유달산이 지켜온 세월

“<목포의 눈물>은 겨레붙이 모두의 노래였다”

2017-05-22 08:47

조회수 : 5,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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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이었다. 5·18관련자뿐만 아니라 제주4.3항쟁, 4·19혁명 등 다른 역사적 사건들의 피해자들과 함께 5·18민주묘지의 정문인 ‘민주의 문’을 걸어 들어가 5·18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식장에서 진심어린 연설을 남기고, 가슴으로부터의 눈물과 온 마음으로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대한민국의 새 대통령의 모습은 많은 국민들에게 그렇게 감동이었다. 계엄군의 총탄에 쓰러진 5·18희생자의 딸을 아버지처럼 안아주고, 경찰의 물대포에 쓰러진 고(故) 백남기 농민의 부인을 만나 위로하는 지도자를 가지게 된 젊은이들은 ‘이제 이 땅에서 아이를 낳아도 되겠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딸
5·18유족 김소형씨가 자신의 나이와 같이 37주년을 맞은 5.18기념식에서 광주항쟁 당시 희생당한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흐느끼며 낭독할 때 눈물을 훔치던 문재인 대통령은, 추모사를 마치고 퇴장하던 그녀에게 다가가 따듯한 위로의 포옹을 나누었다. 그 순간은 포옹을 나눈 이들도, 그 모습을 보던 이들도 서로의 마음과 마음이 맞닿아 치유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고귀함이란 과연 그런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전남 완도의 수협 직원이었던 아버지 김재평(1951~1980)씨의 사연을 <만인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섬마을에는 / 산부인과 내과 겸한 병원 없으니 / 마누라 먼저 광주로 올라와 / 쌍촌동 작은집에 머물고 / 재평이 혼자 완도에 남아 있었다 // 1980년 5월 18일 / 아내 만삭 산기가 닥쳤다”(‘김재평’, 30권). “시내 곳곳에 계엄군 포진 / 최루탄 쏘아대는 바람에” “아기 낳자마자 두 시간 지나자마자” 친척집으로 돌아온 산모와 아기를 보기 위해 스물아홉 살의 아버지는 완도에서 광주로 달려오게 된다.
 
5월 20일
재평이 광주로 올라왔다
아빠 된 기쁨 잠시 접어두고
금남로 시위에 나서보았다
한밤중 쌍촌동 작은집에 돌아오니
응애응애
아기의 축복이었다
 
최루탄의 거리였다
총알 날아오는 거리였다
5월 21일
고향 가는 길 막혀버렸다
광주 외곽
남편 나주길
계엄군이 에워쌌다
 
5월 22일
총소리 요란하였다
총탄이 거기까지
쌍촌동 일대까지 날아들었다
바깥문 문간방에서
뒤쪽 안방으로 숨었다
아내는 아기 꼭 껴안고 있다
그 옆에서
아빠 재평도 움츠리고 있다
그 안방까지 총알이 날아왔다
갑자기
재평이 귀밑이 뜨거웠다
푹 고꾸라졌다
의식불명
 
무작정 큰길로 나섰다
도로 한가운데 장갑차 늘어서 있었다
통합병원으로 데려가려 했으나
군인들이 막아섰다
위생병이 얼굴에 붕대를 감아주고는
트럭에 실어 상무대로 데려갔다
이미 숨 거둔 뒤였다
 
101사격장 철조망 부근에 묻혔다
(‘김재평’, 30권)
 
전남대 5.18연구소의 5·18관련 증언 자료에는 그의 아내 고선희씨의 증언이 실려 있다. 결혼 3년 만에 딸을 얻었으나 그 4일 후에 남편을 잃어야 했던 그녀는 아빠를 찾는 어린 딸에게 아빠는 돌아가신 게 아니라 “소형이 맛있는 과자랑 예쁜 옷 사오려고 외국에 돈 벌러 가셨제“라고 달래었지만, 딸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의 죽음을 스스로 알게 된다. ‘며칠 동안 베개에 머리를 묻고 울면서 ”아니여 아니여“ 하던’ 어린 소녀는 서른일곱 살이 되어 일만 여 명이 모인 기념식장에서 “아버지, 당신이 제게 사랑이었음을, 당신을 비롯한 37년 전의 모든 아버지들이 우리가 행복하게 걸어갈 내일의 밝은 길을 열어주셨음을… 사랑합니다, 아버지”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된다.
 
 
목포의 5·18
5·18민중항쟁은 광주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광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화롭게 진행되어 잘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목포의 5·18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역사적 조명이 필요하다. 목포에서는 5월 15일~16일 목포대생과 목포실업전문대생을 중심으로 비상계엄 해제와 민주화 일정을 밝힐 것을 요구하는 가두시위가 일어났다. 이후 한동안 조용하던 목포는 광주의 소식이 전해지고 광주에서 시위차량들이 들어오자―당시 광주의 시민군 일부는 외부에 광주의 소식을 알리러 떠났고 항쟁은 화순·나주·영암·강진·무안·해남·목포 등 전남 일원으로 확산되었다―21일 상가 철시, 파출소 파괴, 차량 시위 등이 일어난다. 그러나 22일 안철의 주도 하에 목포시장, 목포대학장, 재야인사, 목사 등이 참여한 관민합동의 대책회의가 열리고 ‘목포시민민주화투쟁위원회’(위원장 안철)‘가 결성되어 무기 회수와 질서 있는 평화시위를 진행하게 된다. 23일 시민대회와 시가행진이 이뤄지고, 시민투쟁위원회 산하에는 학생집행부가 구성되었으며, 생선 행상 아주머니들은 밥을 해서 리어카로 날랐다.
 
문재인 대통령은 5·18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사에서 “오월의 죽음과 광주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세상에 알리려 했던 많은 이들” 중 네 명의 젊은이들(박관현, 표정두, 조성만, 박래전)을 대표로 호명했다. 아직 호명되어야 할 가슴 아픈 이름들이 많으나, 우선 한 젊은이를 더 호명한다. 1986년 6월 6일, 민주화운동 탄압 중지와 5.18 규명,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목포역 광장에서 분신해 6월 26일 세상을 떠난 해남-목포의 청년 강상철(1964~1986)이다.
 
어찌 목포가 이 땅이 아니겠는가
목포야말로
저 남쪽 끝
뼈저리도록 이 땅의 슬픔의 복판
아 저 혼자 솟아오르다
그대로 굳어버린 유달산
어디로 갔나
슬픈 아낙의 잔등 같은 삼학도
이 땅의 복판
 
1986년 6월 목포역 광장
5·18광주·목포 학살의 진상규명대회장
그러나 전경들만 가득 차
민중대회 대신
전경 최루탄대회가 열렸다
이때 여기저기 모였다 밀렸다 하는데
한 마리 성난 짐승 달려나와
양심선언과 7개 요구사항을 외쳤다
전경이 뛰어왔다
물러가라 외치며
제 몸에 불질러
민주여 승리하라
독재여 물러가라 외쳤다
쓰러지며 외쳤다
쓰러져서도 외쳤다
그 뒤 20일간의 병상에서 외쳤다
화상부위 썩어가는데
그 썩어가는 데 벗겨내는 고통으로 외쳤다
끝까지 저 자신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역사를 지켰다
민주여 승리하라
광장을 지켰다
 
< … >
나에겐 중요한 건 조국이요 민족이요 민중이라네
이 서신을 자네가 받아보는 날이
언제일 줄은 모르겠네
내가 목포에서 싸우는 시간 받아볼지
아니면 저 세상에 가서 싸울 때
받아볼지는 모르겠네
< … >
 
목포전문대 학생
학교를 작파한 뒤
목포사회운동청년연합 사무차장
목포민주회복국민회의 청년국 제2부차장
그 이름 강상철
해남 토말의 스물세살
강상철
(‘강상철’, 별편)
 
 
시민들의 궐기대회가 있었던 목포역 광장과 시장상인들이 시위대에게 음식을 제공하던 중앙공설시장 등은 목포의 5·18항쟁을 증명하는 12곳의 사적지를 이루고 있다. 5월 27일 광주항쟁이 계엄군에게 진압될 때까지 수만 명의 시민이 모여 '계엄령 철폐', '전두환 처단', '김대중 석방' 등을 외치며 시민대회와 시가행진, 횃불시위를 계속했던 목포의 민주화운동, 유달산이 목격한 그 역사의 순간들을 기억할 일이다.
 
유달산에 새겨진 ‘목포의 눈물’
목포 유달산의 노적봉(露積峯)은 이순신 장군의 전설로 유명하다. 임진왜란 당시 군사적 열세에 처한 충무공이 큰 바위에 이엉을 둘러씌워 마치 그것이 노적인 양 꾸밈으로써 왜적에게 군량미가 대량으로 비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는 것이다. 영산강에 백토가루를 뿌려 쌀뜨물로 보이게 해 아군의 군세를 위장했다고도 한다. 또한, 주민들에게 군복을 입혀 노적봉 주위를 계속 돌게 해 대군이 있는 것처럼 위장했던 전술이 강강수월래로 발전했다는 전설도 있다.
 
한편, 이 유달산 기슭에는 가수 이난영(1916~1965)의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있는데, 1969년 목포에서 악기점을 운영하던 박오주씨가 세운 것이다. '높은 산(유달산) 밑에 있는 섬'이라는 뜻의 고하도(高下島)는 이순신 장군이 수군기지를 설치해 수군을 정비했던 곳이자, 1904년 처음으로 목화 품종인 육지면(陸地綿)의 재배를 시작했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가 호남 곡창의 쌀과 소금을 수탈해갈 때 목포는 면화 수탈의 중심지였다. 부산과 인천을 연결하고 후쿠오카-목포-중국을 연결하는 목포의 지리적 특성도 일본이 목포를 전략적 거점으로 활용하는 이유가 되었다. 목포의 구 일본영사관과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은 옛 모습을 간직한 채 현재 각각 목포근대역사관 1관, 2관으로 활용되어 일제강점기 수탈의 현실과 근대문화가 형성되던 개항도시 목포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나라 잃은 시절에 태어나 80년 이상을 목포 시민뿐 아니라 온 국민에게 사랑받아온 노래 ‘목포의 눈물’, 그 애잔한 가사만큼 그 노래를 부른 가수의 삶도 고단했다.
 
긴 목 가는 허리
 
남편 김해송이 북에 납치되었다
납치된 자의 가족조차
반공세상에 어긋났다
< … >
 
어린 일곱 남매의 엄마 이난영
 
딸들
숙자 애자 그리고 조카 민자로
‘김씨스터즈’를 만들어
미8군 무대 휘파람 환호성
‘김보이즈’ 영일 상호 태성으로
미8군 무대 박수갈채
 
씨스터즈
보이즈 미국으로 갔다
 
엄마 이난영은 가지 않았다
 
<목포의 눈물>은 겨레붙이 모두의 노래였다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임진왜란은 아직도 원한으로 한으로 안이다가 밖이다가 살아 있었다
(‘이난영’, 20권)
 
천재 작곡가로 불리던 김해송이 납북된 후 “남편이 경영하던 / KPK악극단도 해체당했”지만 어려운 생활 중에도 일곱 자녀들의 음악적 재능을 훌륭히 키워낸 이난영은 자녀들이 있는 미국에 갔다가 일 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왔고 홀로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 파주의 공동묘지에 묻혔던 그녀는 2006년 고향인 목포로 돌아와 유달산이 내려다보는 삼학도의 백일홍 나무 아래 안장되었다. 그녀의 대표곡 ‘목포의 눈물’은 1934년 제1회 향토찬가 공모전에서 1등을 한 문일석의 가사에 작곡가 손목인이 곡을 붙여 1935년 오케(Okeh) 레코드사에서 발매된 음반인데, 노래가 취입되던 당시 일제의 검열로 인해 2절의 가사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중, 임진왜란을 뜻하는 구절인 “삼백년 원한 품은”은 “삼백련원안풍(三柏淵瑀安風)”으로 바뀌어 불렸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식민지 시절을 겪으며 한반도의 백성을 위로해 온 이 노래는 유신시대와 5.18민중항쟁을 겪으며 목포와 호남 주민들의 위로가가 되기도 했다. 이 구슬프고 느린 노래가 호남을 기반으로 한 프로야구단의 응원가로 불리던 1980년대, 1983년 그 팀이 우승을 거두자 이 애절한 노래로 축하를 한 이 땅 민중의 정서를 외국인이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노래가 ‘목포’를 넘어서고 ‘호남’을 넘어서는 ‘한반도 전체’ 국민의 노래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1923년부터 목포 해안에서 시작한 면화현물판매소의 사진이 목포근대역사관에 전시돼 있다. 사진/필자 제공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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