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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찬

(창간2년 특별기획 '다시 경제민주화를 말한다)⑦재벌에 관대한 '법 잣대'도 적폐다

집행유예는 '기본' 특별사면은 '옵션'?…"대통령, 사법질서 근간 흔들면 안돼"

2017-05-1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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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토마토 이우찬·홍연 기자] 재벌(chaebol)은 우리나라에서 생겨난 말이지만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도 실려 있는 고유명사다. ‘커다란 사업 집단으로 특히, 가족 소유를 특징으로 한다’고 사전은 정의하고 있다. 다른 나라의 대기업과 구별되는 특징은 재벌 2, 3세로 이어지는 가족 폐쇄 경영이다. 소수의 지분으로 회사 경영권을 장악한 채 세습을 통해 유지되는 형태다.
 
이런 재벌의 경제권력은 법 앞에서도 위력을 발휘한다. 국내 재벌 총수들은 범죄수익이 수백억대에 달하는 죄를 범해도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거나 유죄가 확정돼도 실형이 아닌 집행유예로 풀려나기 일쑤다.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는 재벌의 죄를 아예 없애주는 데 악용되기도 한다. 사법부와 재벌간 오래된 구태이다. 경제민주화가 시대적 화두로 떠오른 지금 재벌에게도 법의 엄격한 잣대가 적용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크다.
 
법정에 서는 재벌들이 저지르는 주요 범죄는 횡령·배임죄다. 대법원이 공개한 '2016 사법연감'에 따르면 2015년 횡령·배임 혐의로 기소된 4148명 중 54.6%인 2264명이 집행유예를 받은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 5년간 집행유예 선고율을 보면 2011년 58.2%, 2012년 56.2%, 2013년 54.6%, 2014년 52.7% 등으로 50%를 상회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8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최순실 뇌물' 관련 15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최고 고위직 집행유예율 72.6%
 
법 적용이 경제적 계층에 따라 차별적임을 보여주는 통계도 있다. 대검찰청이 2015년 영남대에 의뢰한 연구 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고위직일수록 집행유예 비율이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5년 동안 선고된 횡령·배임 범죄 6950건 중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 1994건을 분석한 결과다. 피고인의 직위를 최고 고위직, 고위직, 중간직, 하위직, 자영업자, 일반인으로 분류했고, 최고 고위직은 72.6%가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하위직의 집행유예 선고비율은 52%, 중간직의 집행유예 선고율은 62.6%로 나타났다. 이 보고서는 “최고 고위직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한 처벌이 이뤄졌다”고 분석했다.
 
 
법조계에서는 ‘징역 3년·집행유예 5년’이라는 공식이 있다. 재벌 총수들의 횡령·배임 사건에서 주로 선고되는 형량이다. 2008년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시작된 삼성 특검 이후 이건희 회장은 징역 3년·집행유예 5년으로 실형을 피했다. 박용성·박용오 두산그룹 총수 형제도 징역 3년·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고, 최태원 SK회장 또한 징역 3년·집행유예 5년 전력이 있다.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김승연 한화그룹 회장도 징역 3년·집행유예 5년 케이스다.
 
현행 특정경제범죄법 횡령·배임죄는 재산 이득액이 50억원 이상이면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가중처벌 규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재판부가 형기의 2분의 1까지 감경해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것이 관행이 돼 여론의 비판을 받고 있다.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있는 징역형의 최대 형량이 징역 3년이고, 집행유예의 최대는 5년인 점도 이유다.
 
 
“법원, 재벌총수 '구속불가' 도그마 깨야”
 
법조계를 비롯한 사회 곳곳에서는 재벌 총수들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 관행은 ‘적폐’이며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혁파돼야 할 과제라고 입을 모은다.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실행위원인 김남근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부회장)는 “징역 3년·집행유예 5년이 공식처럼 된 데에는 법원이 ‘재벌 총수를 구속할 수 없다. 실형을 선고할 수 없다’는 도그마에 갇혀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김 변호사는 “재벌 총수들이 구속되면 기업 위기가 오고 경제 어려워진다는 것은 법률가들이 판단하기 어려운 도그마다. 과연 그런지 실증적인 분석이 없다. SK는 최태원 회장이 구속돼 있는 3년 동안 잘 성장을 했고, 이재용 부회장은 지금 구속돼 있지만 삼성전자는 계속 상종가를 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입법으로 집행유예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결국 법원이 양형 기준에 맞춰서 원칙에 맞는 판결을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양형기준에 있는 특별한 이유를 대가며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있는데, 원칙대로만 하면 실형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살인죄가 가장 무거운 죄로 최하 형량이 5년이다. 이보다 더 높은 형량을 만드는 건 형벌체계상 맞지 않다”면서 “입법적 문제라기보다 결국 법원이 국민 법감정과 법 정의를 되새겨야 한다. 그 시금석이 이재용 부회장 재판이 될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재판 독립 위해 법원구조 개혁 필요”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입법을 통하면 법관의 재량을 지나치게 제한할 수 있어 위헌 소지가 있다며”며 “법관들이 내부적으로 독립해서 재판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법관들이 승진 눈치 안 보고 양심껏 판결할 수 있어야 된다. 인적 청산을 통해 법원 구조 자체를 혁신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재벌들은 광복절 등 특별한 시기마다 정부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해 광복 71주년을 맞아 8월12일 광복절 특별사면을 단행했다. 특사 대상자 4876명 가운데 경제인은 14명으로 이재현 CJ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포함됐다. 이 회장은 횡령 등 혐의로 구속기소 돼 2015년 12월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뒤 대법원에 재상고를 포기한 상태였다. 최 회장도 횡령 등 혐의로 기소돼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2년 7개월가량 복역했다. SK그룹은 이번 국정농단 사태에서 특별사면과 면세점 추가 선정과 관련한 특혜 의혹에 휩싸였다.
 
 
이명박 정부는 2009년 12월31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원포인트 사면'했다. 전례 없는 결정이다. 이 회장은 경영권 불법 승계와 조세포탈 혐의로 기소돼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뒤 최종 판결 4개월 만에 풀려났다. 1997년 10월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징역 2년·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특별사면 된 뒤 받은 두 번째 사면이다. 이 전 대통령이 내세운 명분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였다.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도 비자금 조성 등 사건으로 징역 3년·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으나 73일 만에 사면됐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2002년 12월31일, 유상부 포스코 전 회장은 2010년 8월15일, 정몽준 전 현대중공업 회장은 1995년 8월15일 사면을 받았다.
 
 
2004~2011년 40대 그룹 총수 모두 집행유예
 
재벌총수일가 상당수는 집행유예 판결을 받는 데 이어, 대부분 대통령 특사 혜택까지 받는다. 서기호 전 정의당 의원이 재벌총수일가에 대한 형사재판을 분석한 '재벌범죄백서'를 보면 2004년부터 2011년까지 선고가 이뤄진 40대 그룹 총수 일가의 형사사건은 모두 집행유예 결정이 내려졌다. 대부분 선고 확정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려났다.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은 형 확정 후 50여 일, 정몽구·최태원 회장은 70여 일, 박용성·박용만 두산그룹 형제는 110여 일 등 단기간 내에 특별사면·복권됐다. 서 전 의원은 "비리 기업인을 대통령이 사면한다는 것은 사법질서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라며 "대통령이 사면권을 엄격히 적용할 수 있도록 현행 사면법에 규정된 사면 적용 대상자의 요건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법조계는 사면법을 강화하는 동시에 전문적이고 독립적인 심의제도를 둬서 사면권 남용 소지를 막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남근 변호사는 "전문가들이 사면 가능 여부에 대한 의견을 내는 사면심사위원회를 둬서 일정 범죄에 대해서는 심의를 받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송기춘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사면권에 대한 정치적 통제뿐 아니라 헌법에 사면 기준을 명시해 한계 규정을 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사면의 정당성은 국민 전체의 이익과 부합할 때 확보되며, 아무런 제약 없이 행사될 경우 법치주의 전체를 훼손한다”고 지적했다.
 
 
죄 지은 재벌 총수들에 대한 공정한 처벌과 관련해, 새 정권에 거는 기대는 크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재벌 적폐 청산 좌담회에서 재벌의 중대한 경제 범죄에 대해선 법정형을 높여 집행유예가 불가능하게 하고, 대통령의 사면권을 제한하는 등 무관용의 원칙을 세우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민변 사법위원장을 지낸 이재화 변호사는 “(재벌 총수 사면의 폐해를) 문 대통령이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재벌 총수에 대한 사면을 최대한 자제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우찬·홍연 기자 iamrainshine@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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