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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64화)주권재민의 길

“미군은 일본경찰의 사격이 정당하다고 말했다”

2017-05-08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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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대통령 선거가 드디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지난 몇 달 내내 촛불집회 현장에서 남녀노소 국민들이 즐겨 불렀던 노래 <헌법 제1조>의 내용처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선언이 선언에 그치지 않고 현실화되기 위한 길은 무엇일까? 2008년 촛불집회에서도 숱하게 불렸으나 나아진 현실 없이 2016~2017년의 광장에서도 어김없이 불려야 했던 노래, 그 정당한 주장인 ‘주권재민(主權在民)’은 언제 실현될 것인가? 한반도를 둘러싼 작금의 사태에 더욱 간절해지는 질문이다.
 
외국 군대가 머무는 나라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주권’이란 “국가의 의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력”으로, “대내적으로는 최고의 절대적 힘을 가지고, 대외적으로는 자주적 독립성을 가진다”라고 정의돼 있다. 자주적 독립성! 우리에게 과연 이것이 있을까. 대선을 13일 앞둔 지난 4월26일 새벽,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에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가 기습적으로 배치될 때 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지나가던 차량 속의 한 미군이 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서, 절규하는 주민들을 자신의 휴대폰으로 촬영하며 가는 모습은 가히 통분을 불러일으키고 ‘인간에 대한 예의’를 되묻게 하는 장면이었다. 한 TV 뉴스 인터뷰에서 소성리 부녀회장이 그 모습을 처음 언급하며 비웃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을 때만 해도 중립적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 앵커로서는 ‘미군의 심정을 짐작하기 어려우니 그것이 비웃음인지 멋쩍은 웃음인지 모르겠다’고 부연 설명을 했으나 이후 공개된 동영상―4월29일 광화문 촛불집회의 대형 화면에서는 더욱 잘 확인된 바―을 보면 울부짖는 할머니들을 촬영하던 그 미소에서 ‘멋쩍음’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는 한 미군의 웃음어린 촬영에 있지 않다.
 
지난달 30일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마을회관 앞에서 경찰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부지 내 미군의 유류차의 진입을 위해 주민과 소성리 지킴이들을 해산시키고 있다. 사진/뉴시스
 
외국 군대의 침입
1천번 이상
 
그러나 그들은 물러갔다
압록강
두만강 국경이 뚜렷해졌다
 
1882년 외국 군대가 주둔했다
아니 그 이전
원나라 군대 이래
임진왜란 이래
청나라 / 그 이래
일본 / 러시아 / 미국 / 소련 / 중국
유엔 깃발 아래 16개국
 
한때 중립국 감시군 몇개국 군대
1백20년 동안 외국 군대
 
매카서 장군은 인천에 있고
워커 장군은 워커힐에 있다
옛날 옛적 이여송
평양 무열사에 있었다
그의 동생 이여백과
서너 장수한테도
춘추대제를 지냈다
 
< … >
(‘외국 군대’, 17권)
 
<만인보>가 언급하듯이, 이 땅에 외국 군대가 주둔한 역사는 오래 됐다. 그것은 종종 ‘우호’나 ‘원조’의 이름으로 진행되지만 결국은―매우 당연하게도―모두 자국의 이해관계에 의해서일 뿐이다. 사드를 배치함으로써 미국은 사실상 한반도를 자신의 미사일방어(MD)체계에 편입해 중국을 견제하는 이익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의 사드 비용 청구는 주한미군의 방위비 분담과 한미 FTA 재협상에 있어 미국이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서라는 분석도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한편, 일본은 한국에 배치된 사드 덕분에 자위권이 확대되는 이익을 얻었다. 전시도 아닌 상황에서 완전 무장한 일본의 대형 호위함이 무기를 사용해 미 해군 보급함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항했으니 미-일 정부들은 한반도 정세를 활용해 충실히 자신들의 이해를 실현해 가는 셈이다. ‘영리’하게 군사주권을 확대해 가는 일본과, 그와는 대조적으로 미-일 정부의 ‘호구’ 역할을 해온 한국 정부가 지난 2016년 11월23일에 체결한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GSOMIA)’이 상기되는 순간이다.
 
앞의 시에 등장하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조상은 고려 출신이지만 5대조 때 중국에 정착하였으므로 이여송 자신은 철저한 명나라 사람으로서 조선을 깔보았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당시 2차 원군으로 왔던 그는 음력으로 1592년 12월25일 압록강을 건너 선조가 있던 의주로 와 조선군과 합세하여 음력 1월6~9일에 일본군을 대파하고 평양성을 탈환한다. 이후 남하해 파주에서도 승리를 거듭하자 기고만장해진 그는 화포와 화기수들을 대동하지 않은 채 기마대만 이끌고 벽제관으로 진격했다가 참패를 당하고 만다. 벽제전투에서 패하고 개성으로 퇴각해 더 이상 전투를 하지 않으려는 이여송에게 류성룡 등이 달려가 진격을 간청하지만 거절당하는데, 이때 류성룡 일행은 명군 진영에 군량과 마초(馬草)의 공급이 늦어졌다는 이유로 무릎이 꿇리고 눈물을 흘렸다고 하니, 백성을 버리고 ‘명나라’로 도망가려던 임금이 다스리는 나라의 서글픈 현실인 셈이다.
 
어쨌든 명나라로서는 이미 평양전투의 승리로 자국의 안전을 확보했으니 더 이상 조선에서 ‘희생’할 필요가 없었던지라 일본과 강화하고, 이에 전투를 멈춘 명군은 조선에 머물며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을 일삼게 된다. 조선의 신료들은 작전권을 명군에 맡긴 채 평양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여송을 떠받들고 선조는 북경의 황궁을 향해 수차례 큰절을 올렸으나, 사실 전쟁과정 중 공을 과시하기 위한 명군 지휘부에 의해 조선의 백성들이 숱하게 희생되고 일본군의 수급으로 둔갑됐다. 훗날 류성룡이 <징비록(懲毖錄)>을 써서 ‘미리 (전날을) 징계하고 후환을 경계(豫其懲而毖後患)’ 하고자 한 심정이 납득될 만하다.
 
미군 환영식의 비극
명과 후금(청나라) 사이에서 실용적인 중립외교를 펼친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반정의 공신들은 대체로 친명배금(親明排金)을 주장하는 대명사대주의자들이었다. 때로는 이들의 사고방식이 해방 이래 존속해 온 친미사대주의자들의 의식으로 계승된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국방과 안보를 미군에 의존해야만 하니 전시작전권을 회수해서는 안 되고 북한으로부터 안전하려면 미군이 계속 남한에 주둔해야만 한다는 믿음, 나아가 사드 배치가 여전히 대북방어용이라는 믿음이 아직도 누군가의 견고한 의식 속에 존재한다.
 
70가구 150명 남짓의 작은 시골에 야밤을 틈타 8000명의 경찰병력을 투입해 마을로 들어오는 길목마다 경찰차로 막고, 주민들의 집집마다 경찰들이 조를 짜서 출입을 통제한 채 진행된 작전 덕분에, 줄줄이 밀고 들어오던 미군의 사드 장비 차량들에 대해 고립된 저항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물병을 던지는 것뿐이었다. 2017년 4월 소성리에 진입하는 미군 차량의 광경은 1945년 9월 한반도에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진주하던 미군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 … >
 
미국 매카서 사령부 일반명령 1호
 
조선의 모든 주민은 본관의 권한 아래서
발동한 명령에 바로 복종해야 한다
점령군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또는
안녕을 교란하는 모든 행위는 가차없이
처벌할 것이다
 
1919년 3월 숨었던 태극기가 방방곡곡에 휘날렸다
1945년 8월 이전 묻혔던 태극기가 다시 휘날렸다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었다
그들에게 종이 태극기를 휘날렸다
 
< … >
(‘그해 종이 태극기’, 17권)
 
1945년 9월7일 맥아더가 발표한 포고령 제1호는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한다고 밝히고, 제3조에서 “점령군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또는 공공안녕을 교란하는 행위를 감행하는 자에 대해서는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선포함으로써 미군이 ‘점령군’으로 들어온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그들을 해방군으로 알고 환영하러 나갔다가 죽은 이들이 있다.
 
권평근 47세
이석우 26세
 
권평근은 오랫동안 걸어둔 양복을 꺼내 입었다
항구의 신사가 되었다
이석우도 보안대 완장을 차지 않고
깨끗한 와이셔츠를 입고 나왔다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1945년 9월8일
인천항에 상륙한 미군을 환영하러 나갔다
아직은 일본경찰 경비구역
그곳에서
권평근
이석우가 일본경찰 총에 맞아 죽었다
 
해방의 기쁨 맛보고
해방군
연합군 환영하기 위해 나갔다가 죽었다
< … >
 
조선노조 인천중앙위 위원장 권평근
민간보안대 대원 이석우
그들의 시체에 대해
미군은 일본경찰의 사격이 정당하다고 말했다
 
그날밤 조선노조사무소는
반일과 함께
반미를 부르짖었다
벽에 붙인 연합군 국기의 하나 성조기를 처음으로 내려버렸다
(‘두 사람의 죽음’, 17권)
 
인천 지역 노동자였던 권평근(1900∼1945)은 1930년 인천노동조합 위원으로 선출되고 1931년 좌·우익합작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 인천지회에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과 노동운동을 펼치다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른 인물이다. 당시 노조위원장이던 그와 보안대원이던 이석우는 9월8일 인천에 입항한 미군을 환영하러 나간 인천보안대원과 조선노조 조합원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행진하던 행렬 속에 있다가 일본인 경관들이 발포한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에서 항의하고 대규모의 항의시위가 일어나자 미군은 방첩부대(CIC)를 시켜 사건을 조사하게 하고 조문 제스처도 취하지만, 13일에 열린 군사재판에서 결국 ‘일본 경찰이 폴리스 라인을 넘은 인천시민들에 총격을 가한 것은 정당했다’고 판결하고 총격을 가한 일본인 경관들을 무죄로 방면한다. 포고령 1호의 2조에 따라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들과 친일파 한국인 관리들이 그대로 유임되고 미군정이 기존의 식민지 통치기구와 그 체계를 물려받았으니, 인천 지역의 치안을 맡고 있던 일본경찰이 인천항 전역에 통제령을 내린 미군정의 명령에 따라 발포를 하고 그런 그들을 미군정이 무죄 방면한 것도 기실 놀라울 게 없다.
 
그러나 해방 당시 조선은 상해 임시정부를 비롯한 지도 조직과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고 독립적인 주권국가를 건설할 준비가 돼 있었다. 1945년 8월15일 해방 즉시 여운형의 지도 아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조직됐고 미군의 인천 상륙 전인 9월6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이 선포됐다. 여기에는 우파·좌파·중도파가 망라되고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망라된 성격의 연립정부가 구상됐으나 점령군인 미군정은 이를 철저히 부정했다. 이후에도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며 통합된 나라를 꿈꾸었던 여운형의 노력은 1947년 7월19일 그가 반대세력에 의해 암살당함으로써 통한으로 끝나게 되니, 이 땅은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지금에도 ‘색깔론’에 시달리는 나라로 남아 있다.
 
DDT를 뒤집어 쓴 국민
점령군으로 온 이상,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전 ‘조선의 국민을 적국의 국민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 역시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인을 세균쯤으로 취급하며 살충제인 DDT를 뿌려대던 하지의 오만한 인식이, 조선을 명의 ‘속국’ 오랑캐로 바라보던 이여송의 오만한 인식이, 그들로 하여금 이 땅에서 제멋대로 할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한반도의 주인이 따로 있는 이상, 남의 나라에서 주인인 체 하는 그들의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다.
 
1945년 9월 한반도 이남에 진주한
미 육군 제24군단
승리자는 성벽처럼 당당했다
오끼나와 격전
오끼나와에 상륙한 승리자 하지 사령관이
한반도에 건너왔다
 
처음부터 한국을 싫어했다
한국인은 고양이 같은 족속이야
이 말이 그의 첫말
 
미 군정청
을지로 남선전기 건너
미군 CIC
 
한국인 근무자 출근할 때면
개나 걸이나
누구나 DDT 창고로 데려다가
DDT를 뿌렸다
누구나 하얀 DDT 안개 뒤집어썼다
 
은총이었다
굴욕이었다
 
미군이 가게 될 거리
미리 DDT를 뿌려
온통 하얀 DDT 안개가 자욱했다
 
< … >
(‘DDT’, 17권)
 
이 땅의 주인인 우리가 주인으로 우뚝 서려면, 사드 배치, 위안부 합의가 밀실에서 이루어지지 않게 하려면, 켜켜이 쌓여있는 적폐들을 청산하려면, 국민을 ‘글로벌 호구’로 만드는 정치인들이 더 이상 대통령이 되지 않게 경계할 일이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장비를 실은 트레일러와 미군차량들이 지난달 26일 경북 성주골프장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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