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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향

내 딸은 김지영처럼 크지 않았으면 좋겠다

82년생 김지영

2017-04-25 17:32

조회수 : 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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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어린 나에게 가끔 이해되지 않는 말들을 하곤 했다. ‘원래 네 외삼촌보다 공부를 잘했는데 외할아버지가 외삼촌만 서울로 대학을 보내줬다는 엄마, ‘여자가 무슨 PD를 하려고 그러냐던 아빠, 명절에 내려간 시골집에서는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엄마에게 아들 하나 있으면 딱 좋을 텐데라고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남녀 사이에 우열이 존재한다거나 여성과 남성이 할 수 있는 일들을 구분 짓는 이유를 찾지 못한 나는 그런 말들이 답답하기만 했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 김지영은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를 책임지는 이 시대의 보편적인 여성 캐릭터다. 그녀의 지난 유년시절은 나의 이야기인 마냥 공감이 갔고 그녀가 결혼 이후 겪는 일들은 나의 미래처럼 느껴졌다.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며 눈물이 핑 돌거나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던 장면들을 모아보았다.


#1


살아온 역경에 비해 마음이 여유롭고 또래 시어머니들과는 달리 며느리를 아끼던 할머니는 진심으로 며느리를 생각해 입버릇처럼 말했다. 아들이 꼭 있어야 한다. 아들이 둘은 있어야 한다…….


#2


어머니는 아버지처럼 정해진 직장을 가지고 출퇴근하지는 않았지만 아이 셋을 돌보고 노모를 모시고 집안 살림을 온전하게 맡아 책임지면서 동시에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쉼 없이 찾아 했다. 형편이 고만고만하던 동네의 아이 엄마들이 대부분 그랬다. 당시 보험 아줌마, 야쿠르트 아줌마, 화장품 아줌마처럼 아줌마라는 이름이 따라붙는 주부 특화 직종들이 붐이었는데


#3


잠 깨는 약을 수시로 삼켜가며 누런 얼굴로 밤낮없이 일해서 받는 터무니없이 적은 돈은 대부분 오빠나 남동생들의 학비로 쓰였다. 아들이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고, 그게 가족모두의 성공과 행복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나도 선생님 되고 싶었는데.” 엄마는 그냥 엄마만 되는 줄 알았던 김지영 씨는 왠지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아 웃어 버렸다. “진짜야. 초등학교 때는 오 남매 중에서 엄마가 제일 공부 잘했다. 큰 외삼촌보다 더 잘했어.”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김지영 씨의 어머니가 된 일을, 후후회하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치맛자락 끝을 꾹 밟고 선 작지만 묵직하고 굳건한 돌덩이. 김지영 씨는 그런 돌덩이가 된 기분이었고 왠지 슬펐다.


#4


학교생활 첫 번째 난관은, 많은 여학생들이 경험한 바 있는 남자 짝꿍의 장난이었다. 김지영 씨에게는 그저 장난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남자애들은 원래 좋아하는 여자한테 더 못되게 구록, 괴롭히고 그래. 선생님이 잘 얘기할 테니까 이렇게 오해한 채로 짝 바꾸지 말고, 이번 기회에 둘이 더 친해지면 좋겠는데.”


짝꿍이 나를 좋아한다고? 괴롭히는 게 좋아한다는 뜻이라고? 김지영 씨는 혼란스러웠다.


#5


신경을 쓴다고 썼는데도 자면서 뒤척이다 보면 옷이나 이불에 종종 생리혈이 묻었다. 특히나 옷차림이 얇고 가벼워지는 여름이면 더 잘보였다. 잠이 덜 깨 비몽사몽한 상태로 세수하고 밥 먹고 등교 준비하느라 화장실과 주방, 거실을 오가다 보면 어머니가 기겁을 하면서 김지영 씨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곤 했다. 그럴 때마다 김지영씨는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6


어머니가 교대 얘기를 꺼내자 김은영 씨는 단1초의 망설임도 없이 싫다고 했다. “난 선생님 되고 싶지 않아.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단 말이야. 그리고 내가 왜 집 떠나 그 먼 대학을 가야 해?” “멀리 생각해. 여자 직업으로 선생님만 한 게 있는 줄 알아?” “선생님만 한 게 어떤 건데?”“일찍 끝나지, 방학 있지, 휴직하기 쉽지. 애 키우면서 다니기에 그만한 직장 없다.” “애 키우면서 다니기에 좋은 직장 맞네. 그럼 누구한테나 좋은 직장이지 왜 여자한테 좋아? 애는 여자 혼자 낳아? 엄마, 아들한테도 그렇게 말할거야?”


#7


클라이언트와 같이 점심 식사를 할 일이 있어서 한식당에 갔는데, 고객 회사의 대표가 강된장을 주문하는 김지영 씨를 보고 말했다. “젊은 사람이 강된장을 먹을 줄 아네? 미스 김도 된장녀였어? 허허허허허.” 된장녀라는 신조어가 생겨 났고, 여성들을 비하하는 무슨무슨 녀,라는 말들이 한창 유행하던 즈음이었다. 웃으라고 한 말인지, 우습게 보고 한 말인지, 된장녀라는 말의 뜻을 알기나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8


그래도 지영아,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얻게 되는 걸 생각해 봐. 부모가 된다는 게 얼마나 의미있고 감동적인 일이야. 그리고 정말 애 맡길 데가 없어서, 최악의 경우에, 네가 회사 그만두게 되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책임질게. 너보고 돈 벌어 오라고 안 해.” “그래서 오빠가 잃는 건 뭔대?” “?” “나는 지금의 젊음도, 건강도, 직장, 동료, 친구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도, 계획도, 미래도 다 잃을지 몰라. 그래서 자꾸 잃는 걸 생각하게 돼. 근데 오빠는 뭘 잃게 돼?” “, 나도나도 지금 같지는 않겠지.


#9


애 보고, 빨래하고, 청소하고……손목을 안 슬 수가 없어요.” 김지영 씨가 푸념하듯 낮게 말하자 할아버지 의사는 피식 웃었다. “예전에는 방망이 두드려서 빨고, 불 때서 삶고, 쭈그려서 쓸고 닦고 다 했어. 이제 빨래는 세탁기가 다 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다 하지 않나? 요즘 여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중략... 예전에는 일일이 환자 서류 찾아서 손으로 기록하고 처방전 쓰고 그랬는데, 요즘 의사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예전에는 종이 보고서 들고 상사 찾아다니면서 결재 받고 그랬는데, 요즘 회사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예전에는 손으로 모심고 낫으로 벼 베고 그랬는데, 요즘 농부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라고 누구도 쉽게 말하지 않는다.


#10


정확하지는 않지만 간간이 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나도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커피나 마시면서 돌아다니고 싶다맘충 팔자가 상팔자야...중략...“오빠, 1500원짜리 커피 한잔 마실 자격도 없어?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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