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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호

(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50화)정경유착의 역사

“한양 만호의 목숨줄이니 / 그대로 돌게 하거라”

2017-01-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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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6일 최순실-박근혜 게이트 1차 청문회에 불려 나온 재벌 총수들의 모습은 1988년 제5공화국 청문회에 불려 나왔던 그들의 아버지들을 상기시켰고, 아버지에서 아들로 바뀌었을 뿐 28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이 무색하게 닮은꼴이었던 두 청문회는 대한민국 정경유착의 산 역사로 기록되게 되었다. 역대 정권에서 늘 있어온 일인데 뭘 그러느냐고 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잘못된 것은 그것이 타성이 되었다고 해서 당연시될 것이 아니라고,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 라고.
 
조선시대 거상과 현대 재벌의 차이
의주 거상(巨商) 임상옥(1779~1855)의 삶을 다룬 최인호의 장편소설 <상도(商道)> 덕분에 인구에 많이 회자된 문구가 있다.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 이 문구를 자신의 철학으로 삼아 재물은 고이지 않고 물처럼 공평히 흐르도록 하고 사람은 저울처럼 바르고 정직하게 살 것을 강조했다는 임상옥의 이야기는 갖은 부정ㆍ비리로 축재에만 급급한 현대 한국의 재벌들과 비교되어 독자들에게 더 많이 감명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임상옥 역시 정경유착의 굴레에 매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정조 20년(1796년) 상업을 시작해 순조 10년(1810년) 국경지방의 인삼무역독점권을 갖게 된 데는 당시 이조판서이던 박종경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박종경의 누이가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였는데, 그런 박종경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 임상옥이 장사(葬事) 치를 비용을 댔고 그 덕분에 세도가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는 설이다(다른 설도 있다). 게다가, 1811년 음력 12월에서 이듬해 음력 4월까지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때 송상(개성 상인)이 난에 협조했다가 세력이 약해진 반면, 만상(의주 상인)인 임상옥은 관(官)이 난을 진압하는데 일조해 인삼무역독점권의 기반을 튼튼히 하게 된다. 전해오는 기록들이 많지 않고 또 서로 다르다보니 확언할 수는 없으나 정치권력과 무관하게 장사를 하기는 어려웠을 터, 이를 배경삼아 거부가 되었다면 정경유착의 틀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지만 그가 이재민을 구제하고 수재의연금을 내는 등, 기부를 통해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는 점, 빈민구제에 힘쓰고 사람을 귀히 여길 줄 알았다는 점에서(대기업들이 산재노동자들을 대하는 태도를 상기해보라) 현대의 한국 재벌들과는 천양지차인 셈이다.
 
임상옥이 사재를 털어 수재민 구휼에 힘쓴 공으로 헌종 1년(1835년) 종3품인 평안도 구성(龜城)부사로 승진했으나 비변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는 것은 사ㆍ농ㆍ공ㆍ상 서열에서 제일 끝에 있던 상인들이 조선시대 신분제도의 제약으로 인해 받아야 했던 차별을 대변해 준다. 그런 점에서도 이른바 ‘로열패밀리’라 불리는 재벌가의 행태는 물론이거니와, 최근 비행기에서 또는 술집에서 안하무인으로 저지르는 중소기업 소유주 2세들의 패악은 신분차별의 조건 속에서 부를 축적하고 예(禮)에 밝았으며 공적 이익에 기여할 줄 알았던 임상옥과 같은 경제인―비록 정경유착에 얽매이고 홍경래의 난에 대립했던 전력이 있으나―조상에 비해 현저히 질이 떨어지는, 비교불가의 후손들일 수밖에 없다.
 
김만덕은 ‘정조실록’ 등 정사는 물론, 정약용과 박제가 등 당대 실학자들에 의해서 시와 문장으로 남겨졌다. 사진/뉴시스
 
국중대부(國中大富) 역관 변승업(1623~1709)
만상의 사환으로 일을 시작했던 임옥상과는 달리, 조선시대 거부들은 종종 역관 출신이었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변승업이다. 역관이 되려면 잡과(雜科)를 통과해야 했는데, 역(譯)ㆍ의(醫)ㆍ음양(陰陽, 천문·지리·명과학)ㆍ율(律)의 잡과(雜科)나 기타 취재(取才)를 통해 선발되는 기술직 하위 관원 그리고 화원ㆍ악공 같은 예술가들은 중인 신분에 속했다. 즉 중인은 현대의 의사ㆍ변호사ㆍ동시통역사ㆍ공인회계사 같은 전문직 종사자들과 화가ㆍ음악가 같은 예술가들이었는데, 이들 중 역관이 거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외국을 왕래하며 무역을 병행했던 덕이다. 변승업은 역관 집안 출신으로, 그의 부친 변응성(1574~1652)이 광해군 5년(1613년) 역과에 합격한 이래 그의 자녀 9남 1녀 중 막내아들 변승업을 포함, 모두 6명의 아들이 역관이 되었다. 이후 한말까지 밀양 변씨 집안에서 약 280년 동안 106명이 역과에 합격했고 변응성 가계에서만 역과 46명을 포함해 75명의 잡과 종사자가 나왔다고 하니 가히 역관으로 특화된 집안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직업적 이점을 이용해 거부 무역상이 된 내력이 있다.
 
1623년 태어나 1709년 묻히다
 
청국과의 무역
일본과의 무역
국내 고리대금 변승업
 
자 박지원 『허생전』 편다
 
남산골
10년 기약으로
글 읽는 허생이
마누라 등쌀에 져주고 나서
천둥벌거숭이로
장삿길 나선다
그 서투른 장삿길 뒷돈이
갑부 변승업의
할아버지 돈이라
허생이
돈 일만냥 빌리러 왔소 하자
변노인
그러구려 하고
일만냥 냅다 주었다
허생 아무 말 없이 돈 받아갔다
 
허생의 장사 솜씨 열려 운 열려
변노인의 빚 일만냥은
뒷날
십만냥으로 갚았다
 
이런 조부 이어
손자 변승업의 장부 들여다보니
여기
저기
또 저기
50만냥 빚 준 것
그 돈 거둬들이자고
아들이 말하자
아니다 한양 만호의 목숨줄이니
그대로 돌게 하거라
 
변승업
장안의 겨울 순라군 밤참도 대접하고
원근 각처
찌든 가난들 자주자주 구휼하고
주린 군대에도 쌀 보내 배를 불렸다
임오군란 때
그의 후손들 집집마다
불타지 않고 무사한 것
다 변승업 덕택
 
< … >
 
변승업 뒤
변승업 없다 쯔
(‘변승업’ 28권)
 
<허생전(許生傳)>은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청나라 연경(북경) 견문기인 <열하일기>의 <옥갑야화(玉匣夜話)>편에 실려 있다. <옥갑야화>는 사행(使行)에서 돌아오는 길에 ‘옥갑’이라는 여관에 모인 비장(裨將)들이 역관들의 뒷얘기를 하는 형식인데, 역관들이 외국을 왕래하며 돈을 번 것과 신의에 관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누군가가 변승업에 대해 이야기하자, 연암도 윤영이라는 사람한테서 들은 것이라며 허생이 변승업의 조부인 변부자로부터 만 냥을 빌려 매점매석과 무역으로 돈을 벌고, 빈 섬에 이상국을 세워 변산의 떼도둑들을 정착시킨 후 조선에 돌아와 사회개혁을 주창하다가 사라지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이 <허생전(許生傳)>이다. 연암은 허생의 입을 통해 매점매석이 나라를 병들게 만들 것이라 경고했는데, 재벌들의 독점이 한국경제를 병들게 한 것을 생각해 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가 표준영정 제82호로 지정된 김만덕 표준 영정. 사진/뉴시스
앞서 <옥갑야화>에 실린, 누군가가 변승업에 대해 이야기한 내용은―시에서도 나타나지만―다음과 같다. 변승업이 중한 병에 걸리자 돈놀이로 빌려준 돈의 총액을 알기 위해 모든 장부를 모아 통계를 내었는데 은(銀)이 50여만 냥이나 되었다. 돈을 흩으면 거두기 귀찮고 시일을 오래 끌면 소모되고 말 테니 그만 거래를 끊는 것이 좋겠다고 아들이 청하자 승업이 크게 분개하며 대답하기를, “이는 곧 서울 안 만호(萬戶)의 명맥(命脈)이니 어찌 하루아침에 끊어버릴 수 있겠느냐” 했다는 것. 이야기는 계속해서 나이 든 변승업이 자손들에게 경계시킨 내용을 전한다. “내 일찍이 공경(公卿, 삼정승과 아홉 고관직)들을 섬겨본 적이 많은데 그들 중에 나라의 권세를 잡고서 자기의 사사로운 이익을 꾀하는 자 치고 그 권세가 삼 대를 뻗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온 나라 사람 중에서 재물을 늘리는 이들이 으레 우리 집 거래를 표준삼아서 오르내리는 것도 역시 국론(國論)인 만큼, 이를 흩어버리지 않는다면 장차 재앙이 미칠 것이다.” 이와 같은 변승업의 경고를 전한 화자는 “그러므로 이제 그 자손이 번창하면서 모두들 가난한 것은, 승업이 만년에 재산을 많이 흩어버린 까닭이다”라고 이야기를 마치는데,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정자들과 재벌들, 국정농단의 주범들에게 참으로 들려주고 싶은 경고가 아닐 수 없다.

거부(巨富) 역관 장현(1613~?)의 세도와 몰락
일본과 중국 사이의 중개무역, 국내 고리대금업 등으로 막대한 거부가 되었으나 중인 신분으로서 양반들의 표적이 되지 않도록 늘 몸을 낮추어 가능한 정쟁을 피해간 변승업과는 달리, 또 한 명의 국중대부인 역관 장현은 장옥정(희빈 장씨)의 아버지인 장경의 사촌형으로 문관들의 견제와 공격을 받았다. 그는 정쟁에 휘말려 경신환국(숙종 6년, 1680) 때 유배에 처해졌다가 복직되었고, 기사환국(숙종 15년,1689) 때 장희빈과 남인세력이 권력을 잡자 활동이 원활해졌다가, 갑술환국(숙종 20년, 1694) 때 장희재의 친족이란 죄명으로 노론의 탄핵을 받아 다시 유배되었다.
 
장현의 딸이 변승업의 큰며느리이고, 장희빈의 외할머니가 변승업의 큰할아버지 딸이었으니 두 집안은 이래저래 얽히는 사돈 간이기도 했다. 장현은 청나라에 대한 첩보활동과 무기 밀입 등의 공로로 숙종 3년(1677년) 품직이 종1품 숭록대부에 이르렀으나, 이후 공을 세울 때마다 왕이 정1품 보국(輔國)으로 품계를 올려주려 해도 그가 역관이라는 이유로 문관들이 반발해 결국 그의 아들들의 품계를 대신 올려주었다 한다.
 
17세기 전반 역관 장현이 투전을 들여왔다
대물림 역관
청나라길 빈번
 
투전 80장
두꺼운 쪽종이 기름 먹여
손가락 굵기의 폭에
길이는
한 뼘
 
한 면에는
사람
물고기
노루
토끼
말 등의 그림
혹은 흘려쓴 끗수
 
같은 그림
같은 글자가 열 개 모여 80장
이를 일러 팔목(八目)이라
 
< … >
 
역관 장현
장희빈의 오촌 당숙
역관은 역관이되
그 권세 사대부를 웃돌았으니
청나라 오가며
무역으로 큰 부를 이루었으니
 
과연 조선의 부가
중인에게 모였고
조선의 사치
중인이 퍼뜨렸다
조선의 풍류 주색
중인의 밤이었으니
또한 조선의 도박
중인의 파적거리라
 
이른바 중인의 자제들은 독서 전폐
방탕 일삼아
투전 도박을 문장으로 알고
주색을 전시(殿試)로 삼아
인품을 제대로 갖춘 자 없나니……
 
장현의 건기침 한번에
한양성내 동당치기 가보치기로 날이 새도다
다 털리고 나면
처첩도 걸어
한 끗발 조이며 넋 나간다 기껏 다섯 끗
(‘장현’, 19권)
 
장현은 무역으로 큰돈을 벌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딸 한명을 궁녀로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그의 정치적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비록 임옥상이나 변승업이 돈을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게 할 줄 알고 빈민구제에 힘썼다는 점에서 현대의 경제인들이 매우 본받을 만한 태도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중인이라는 신분의 한계 속에 정치권력을 가진 양반과 당파세력들의 비위를 맞추며 뇌물을 공여했다는 점에서 현대의 정경유착을 상기시킨다. 특히 장현 일가의 경우 그 유착관계가 심하고 뇌물과 비리를 통한 축재가 컸으리라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 수준이나 신분사회의 한계로부터 벗어난 21세기를 살고 있기에, 뇌물과 특혜로 얼룩진 이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건전한 방식으로 정치후원금을 조성할 수 있으며, 공정하게 자본을 경쟁시킬 수 있고, 또한 정당한 사회복지와 분배 정의를 누릴 수 있다. 더디게 나가더라도 이제 그 첫 발을 떼어야 한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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