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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철

(시론)안중근, 후세 다쓰지, 코마르딘

2015-09-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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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회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나라다. 원래 가까이 사는 나라는 서로 친하게 지내는 법, 한일 관계도 전쟁의 역사보다는 평화와 친선의 역사가 길다. 그러나 한일 관계는 일본의 조선병탄으로 결정적으로 변했다. 바로 이웃한 나라의 관계가 침략과 전쟁, 식민과 독립의 적대적인 관계로 바뀌었다.
 
해방 70년, 패전 70년이 흘렀다. 공식적으로 한일의 과거질서가 바뀐지 70년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 새로운 한일 관계를 규정하는 질서, 가치는 출현하지도 정착하지도 못했다. 국가 차원의 관계는 정상회담이 어려울 정도이다. 청소년 사이의 감정도 악화되고 있다. 독도를 둘러싼 영토분쟁도 여전하고 역사 인식도 차이가 있다.
 
마땅히 사이가 좋아야 할 한일 관계가 개선이 잘 안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역사인식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인식은 곧 법률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한일간 역사인식에 극도로 차이가 나는 사례로 세 가지가 있다.
 
먼저 안중근 의사의 경우이다. 우리는 안중근 의사를 최고의 독립운동가로 기억하고 기념한다. 독립운동 초기에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국제적인 시각을 가졌다. 그의 생각은 이미 대한민국 정체성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단순히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만 이토 히로부미를 쏜 것이 아니었다. 동양의 평화라는 큰 시각을 가졌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가 생존한다면 한국 뿐 아니라 일본도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실제 이토 히로부미가 꿈꾸었던 일본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저질렀고 핵폭탄 투하로 멸망했다.
 
이러한 안중근 의사를 일본은 범죄자로 기억할 뿐이다. 일본 정부를 대표하는 관방장관의 공식적인 발언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범죄자라는 것이 법원의 판결문에 남아 있으니 범죄자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법원의 판결문은 영구보존되는 문서이다. 법원의 판결 보다 역사의 평가가 근원적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법원의 판결문이 남아 있는 이상 역사의 평가를 거부할 핑계거리가 될 수 있다. 정리되지 않은 과거사의 영향이다.
 
조선인의 벗, 후세 다쓰지 변호사의 경우도 비슷하다.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일본인이다. 일본인으로서 건국훈장을 받은 사람은 후세 변호사가 처음이자 지금까지 마지막이다. 재일조선인들은 그를 자랑스럽게 ‘조선인의 벗’, ‘우리의 변호사’로 불렀다. 조선청년독립단 변호, 박열 일본 황태자 암살기도 사건 변호, 의열단원 김지섭 지사 변호, 조선인 토지반환 소송 제기 등 법정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그는 조선인 차별 철폐 운동도 벌였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항의하고 조선인의 권익을 위하여 활동했다.
 
그는 일본인 변호사이면서 일본에 의하여 탄압을 받았다. 그는 1932년 변호사자격을 박탈당했고 1939년에는 치안유지법에 의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변호사 등록이 박탈당했다. 국가주의가 기승을 떨치던 시대에 그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인권에는 국경이 없다는 인식을 한 인권 변호사이자 국제주의자였다.
 
후세 변호사는 일본에서는 범죄인으로 기억되지만 한국에서는 독립 유공자로 기억된다. 격동의 시대 동아시아를 무대로 활동했던 위대한 변호사의 기억이 이렇게 다르다. 심지어 기억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의 법조인들도 대부분 후세 변호사를 모르고 일본인들은 말할 것도 없다.
 
한국 이름 양칠성, 일본 이름 야나가와 시치에이, 인도네시아 이름 코마르딘의 삶도 한일 사이에 공동의 기억이 없다. 그는 조선인으로서 일본 군무원으로 인도네시아에서 근무했다. 주된 임무는 포로 감시였다. 일제 패망 후 그는 인도네시아에 남았다. 인도네시아인들과 함께 네델란드에 대항해 독립전쟁을 벌인 것이다. 그는 인도네시아 독립영웅으로 인도네시아에서 죽었고 그곳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양칠성의 정체성은 실로 복잡하다. 조선인으로서는 일본에 의한 피해자, 일본 군무원으로서는 일본인과 같은 가해자, 인도네시아에서는 독립영웅. 마치 영화처럼 기구한 인생을 살았다. 그와 비슷한 삶을 살았던 조선인 군무원은 B, C급 전범으로 처벌받았다. 역시 판결문에 나와 있는 이야기이다. 양칠성은 비록 인도네시아 독립영웅으로 죽었지만 그의 인생도 행복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어머니가 기다리는 고향 전주에 돌아가지 못했다.
 
이 모든 인물에 대한 기억이 같을 때, 한일 간의 관계는 더 깊어질 것이다. 공통의 역사, 공통의 인물, 공통의 감정, 공통의 가치를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행했던 과거사를 정리함으로써 공동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 과거사 정리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가치는 국가 우선의 가치가 아니다. 희생자에 대한 애도를 포함한 인류 보편의 가치이다. 사람을 중시하는 인권 중심의 가치이다. 이처럼 동아시아 공동체가 인권중심의 공동체가 되려면 최소한의 작업으로 과거사 정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과거사 정리는 법률적 청산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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