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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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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범종입니다.
"강했어요. 무서웠고"

2023-02-09 18:38

조회수 :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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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뚫어! 뚫어 송태섭!" 북산고 농구부 매니저 이한나가 외치자, 키 168㎝ '넘버 원 가드' 송태섭이 산왕공고의 장신 둘을 제칩니다. 하지만 좁혀질 듯 벌어지는 점수차. 서태웅의 공을 받은 강백호가 포물선을 그리자, 경기장에선 아무 소리도 안 들립니다. 남은 1초가 0이 되는 순간 골망이 출렁였고, 전광판에 79대78이 찍히며 함성이 터졌습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예고편. (사진=유튜브 갈무리)
 
단단한 벽을 뚫은 청춘들의 '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가 연초 극장가를 달궜습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존재만으로 벅찬 젊음이 바닥을 구르고 사방에 튀었다가, 끝내 날아올라 꿈에 닿는 감동을 줍니다.
 
여기 높은 벽을 마주한 청춘이 더 있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하얼빈역에 내린 조선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조준선에 오르자,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이 방아쇠를 당깁니다. "이토. 당신의 헛된 꿈은 이제 끝났소.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내 꿈도 이제 끝이오(영화 '영웅')." 시끄러운 환영 인파 속에서 안 장군의 하얼빈도 적막했을 것입니다.
 
선수 송태섭은 전국 최강이란 벽에 공을 쐈고 포수 안중근은 견고한 이토의 세상에 방아쇠를 당겼는데, 결말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선수는 집에 갔고 포수는 지금도 유해를 못 찾았습니다.
 
몰래 경기장을 찾아가 송태섭을 응원한 엄마는, 오키나와 해변에서 아들에게 묻습니다.
 
-산왕은 어땠니.
"강했어요···. 무서웠고."
 
-고생했다.
 
등장 인물을 맞바꿔도 어색하지 않은 이 대사를, 영화 속 안중근은 못 해보고 떠납니다. 최근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클로징 크레딧을 보며 든 생각입니다.
 
뮤지컬 영화 ‘영웅’ 예고편. (사진=유튜브 갈무리)
 
집에 돌아와 불 꺼진 방에 앉았습니다. 강하고 무서운 나라 일본의 왕이 자고 있을 황궁의 고요함을 떠올렸습니다. 이 평온함의 벽을 '전쟁 가능 국가'와 '위안부'와 '다케시마'와 '일본해'와 혐한과 사도광산이 단단히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토의 세상은 굳건합니다.
 
텅 빈 경복궁. 강녕전의 적막함을 떠올립니다. 여순 땅 어딘가에 묻혀있을 안 장군의 서러운 잠을 떠올립니다. 양국 젊은이가 K팝과 드라마와 슬램덩크를 함께 보지만, 안 장군이 꿈꾸던 동양평화가 왔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나의 잠을 준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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