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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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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유승민의 좌절, 박근혜 이어 윤석열 '벽'…정계은퇴 시사

경기지사 경선서 김은혜 52.67% 대 유승민 44.56%…윤심 등에 업은 초선에 무릎

2022-04-22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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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토마토 최병호 기자] 유승민 전 의원이 또 좌절했다. 경기도지사 후보 공천에서 초선인 김은혜 의원에게 일격을 맞았다. 대선에 두 번이나 도전한, 17대 국회 이후 대구에서 내리 4선을 한 관록이 '초선'에게 무너졌다. 그는 이를 "자객의 칼에 맞았다"고 비유했다. 자객은 '김은혜'였고, 칼은 '윤심'이었다. 때문에 그는 "(김은혜가 아닌)윤석열 당선자와의 대결에서 졌다"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권력의 칼춤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간다"는 뼈 있는 말을 남겼다. "여기가 멈출 곳"이라는 말과 "정치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는 정계은퇴를 시사했다. 개혁보수의 상징이었던 유승민의 퇴장 선언처럼 들렸다. 
 
정진석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장은 22일 오전 국회에서 경기·인천·울산·경남 광역단체장 공천 결과를 발표하고, 김은혜 의원을 경기도지사 후보로 확정했다. 이번 경선은 지난 19일부터 20일까지 이틀 동안 당원투표 50%와 일반국민여론조사 50%를 합산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김 의원이 현역 출마 감산점(마이너스 5%)를 적용하고도 최종 득표율 52.67%를 획득했다. 유승민 전 의원은 44.56%에 그쳤다. 격차는 8.11%포인트로, 예상 외였다.
 
19일 유승민 국민의힘 경기도지사 예비후보가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유 전 의원은 지난 20대 대선 경선에서 고배를 마신 뒤 한동한 칩거하며 정계은퇴를 고민했다. 주위의 말을 들어보면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고민과 함께 '정치를 해야 하는 이유'를 다시 찾았다고 한다. 이후 그는 정치적 근거지였던 대구를 떠나 수도권으로 향했다. 경기지사를 발판으로 대선에 마지막으로 도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마저 좌절됐다. 사실 그가 대구를 떠나야 했던 이유는 박근혜 전 대통령 때문이었다. 5년을 절치부심하며 대선을 준비했지만 '배신자' 프레임에 막혀 힘 한 번 써보지 못한 채 경선에서 처참하게 패배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동정론은 그에 대한 비난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보수의 심장부인 대구·경북의 냉랭함을 피부로 느꼈다. 게다가 신년 특사로 자유의 몸이 된 박 전 대통령이 대구 달성으로 돌아왔다. 그는 떠나야 했다. 행선지는 경기도였다.
 
유 전 의원이 경기도지사에 도전한 건 재기를 위한 궁여지책인 면과 함께 당을 위한 결단이기도 했다. 국민의힘도 경기도지사로 나설 인물난에 시달렸다. 20대 대선에서 경기도는 이재명 민주당 후보에게 50.9%를,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에게 45.6%를 줬다. 서울과는 정반대였다. 이재명 상임고문이 정치적 재기를 위해서라도 6월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지원사격에 나설 건 불을 보듯 뻔했다. 대항마로 유 전 의원이 연고도 없는 경기도지사 후보로 집중 거론됐다. '개혁보수'의 상징을 가진 덕에 초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윤석열의 입'을 맡은 김 의원이 나서자 상황은 180도 바뀌었다. 경선 흥행용 불쏘시개라는 평을 뒤집고 '윤심'의 힘을 보였다. 선대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막강한 조직력은 당심을 잡았다.  
 
유 전 의원은 결국 "윤석열 당선자와의 대결에게 졌다"고 했다. 그는 공천 결과 발표 이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공정도, 상식도 아닌 경선이었다"며 "윤석열 당선자와의 대결에서 졌고, 자객의 칼에 맞았다"고 했다. 특히 "2016년 진박 감별사들이 칼춤을 추던 때와 똑같더라"면서 "권력의 칼춤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간다"고 했다. 다분히 윤 당선인을 향한 말이었다. 그는 끝으로 "정치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경기도를 사랑하겠다"면서 "여기가 멈출 곳"이라고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윤석열 당선인까지, 거대한 벽 앞에 그는 발길을 멈춰야 했다. 
 
유승민의 정치인생 22년원조친박서 탄핵 주도까지 
 
유 전 의원은 지방선거 경선에서 패한 소회로 '2016년 진박 감별사'라는 말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유 전 의원의 정치인생을 반추하며 그 의미를 짚어본다. 경제학 박사 출신의 유 전 의원은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일하다가 2000년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에 발탁, 여의도연구소장을 맡으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유 전 의원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고, 이듬해 1월엔 그를 눈여겨본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비서실장을 맡게 됐다. 이때 인연으로 유 전 의원은 '원조친박'이 됐다. 비례 초선임에도 한나라당 제3정책조정위원장을 지내고 국회 정무위원회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활동, 당내 '경제통'의 입지를 다졌다.

유 전 의원은 그해 10월 전략공천에 의해 대구 동을 보궐선거에 출마하게 된다. 당시 열린우리당 후보로 나선 건 이강철. 그는 참여정부 정무특보로 출신으로 '왕특보'로 불렸고, 대구·경북(TK) 운동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접전이 예상됐으나 당선을 위해 박 대표 등 당 지도부가 총출동했고, 유 전 의원은 7.89%포인트 이 후보를 제쳤다. 유 전 의원은 이후 2007년 대선 한나라당 경선에선 박근혜캠프의 정책메시지 총괄단장으로 활동, 이명박 후보의 BBK 주가조작 사건 등을 파헤쳐 'MB 저격수'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2010년 2월18일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과 유승민 의원이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뉴시스)
 
유 전 의원은 선수를 높여가며 2011년엔 한나라당 최고위원을, 2012년엔 국회 국방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친박계 핵심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정치권에선 그 무렵부터 박근혜-유승민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평가다. 2012년 2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주도로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변경할 때 공개적으로 "새누리라는 당명엔 가치와 정체성이 없다"면서 "비대위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한 게 대표적이다. 특히 2014년 유 전 의원은 국회 국정감사 때 박근헤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을 질타하면서 "이거 누가 합니까. 청와대 얼라들(어린이를 뜻하는 경상도 방언)이 하는 겁니까"라고 발언해 큰 논란을 낳기도 했다.
 
유 전 의원이 박 전 대통령과 노골적으로 대립하며 결별한 건 2015년이다. 유 전 의원은 그해 2월 새누리당 원내대표에 취임했는데, 4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그 유명한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는 말을 하며 박근혜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한 것. 당시 연설에서 유 전 의원은 "창조경제를 성장의 해법이라고 자부할 수는 없다", "잠재성장률을 4%대로 높이는 일은 3년의 개혁으로는 달성하기 어렵다", "지난 7년 새누리당 정권에서 제대로 된 경제성장의 해법이 없었다"고도 말했다. 더구나 "10년 전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양극화 해소를 시대적 과제로 제시했다"며 "그분의 통찰을 높이 평가한다"고까지 했다.정치권은 발칵 뒤집혔다. 집권여당 원내사령탑이 청와대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건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2015년 4월8일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급기야 그해 6월 박근혜 대통령은 상위법을 침해하는 정부의 시행령 제정을 규제하는 국회법 개정안에 거부권 행사를 하면서 유 원내대표를 겨냥, "국민들이 배신의 정치인을 심판해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는 유 전 의원의 주장에 박 전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로 받아친 셈이다. 유 전 의원은 청와대와 당내 친박계로부터 원내대표 사퇴 압박에 시달리다가 결국 그는 7월8일 원내사령탑을 내려놓는다.  
 
이후 유 전 의원은 친박계에서 완전히 배제, 2016년 20대 총선에선 공천에서 배제되는 초유의 일이 발생한다. 결국 유 전 의원은 새누리당을 탈당, 무소속으로 출마해 4선 고지를 밟는다. 20대 총선 당선 후 유 전 의원은 새누리당에 복당했지만, 박근혜정부와 새누리당에서 개혁보수를 하겠다는 마음은 이미 떠난 듯 했다. 실제로 2016년 10월 박근혜 국정농단 사태가 발생하자 "나도 '이건 정말 나라도 아니다라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해 11월엔 공개적으로 탄핵을 언급 "훨씬 중대한 헌법·법률 위반 사안이기 때문에 국회가 탄핵 절차에 바로 착수하는 게 맞다"고도 했다. 마침내 그해 12월9일 국회는 박 전 대통령은 대한 탄핵소추안을 가결했고, 이듬해 2017년 3월10일 헌법재판소는 박 전 대통령의 파면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바른정당→바른미래당→새로운보수당→미래통합당
 
역설적으로, 이후부터 유 전 의원도 가시밭길을 걷게 됐다. 박 전 대통령 탄핵으로 새누리당이 무너지자 유 전 의원은 유승민계, 비박계 등 30명을 규합해 바른정당을 창당했다. 이후 19대 대선에 도전했으나 문재인 민주당 후보는 물론 홍준표 새누리당 후보,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에도 밀린 4위였다. 유 전 의원은 이후 안철수 대표의 국민의당과의 합당해 바른미래당을 만들고 제3지대론을 구상했으나 무위에 그쳤다. 결국 분당 후 새로운보수당을 창당했다가 2020년엔 자유한국당과의 합당해 미래통합당으로 만드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2017년 4월17일 유승민 바른정당 대선후보가 서울시 송파구 잠실동 석촌호수 인근에서 선거 유세하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유 전 의원은 2021년 20대 대선 경선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당내 경선도 넘지 못했다는 건 2017년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섰다는 '배신자 프레임'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다. 유 전 의원은 대선 경선 때 배신자 프레임을 벗고자 TK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공을 들였지만 덫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오히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동정론이 그에 대한 비난 강도를 높였다. 보수의 심장 TK에서 한계를 보인 유 전 의원은 경선 때 한 번 제대로 못쓰고 퇴장했다. 5년간 절치부심하며 20대 대선을 노렸으나 박근헤의 벽만 단단히 실감한 것. 여기에다 신년 특사로 자유의 몸이 된 박 전 대통령이 대구 달성으로 돌아왔다. 유 전 의원으로선 재기하려면 지방선거 또는 총선에 출마해야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이 있는 TK에선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유 전 의원은 결국 당의 경기도지사 차출을 수용한다. 애초 유 전 의원은 대선 경선에서 탈락한 뒤 사실상 칩거했다. "정치적 소명을 다했다"며 정계은퇴의 뜻도 내비쳤다. 하지만 전격적으로 경기도지사 출마를 선언한 건 도지사를 발판으로 대선에 다시 도전하겠다는 의지다. 인지도와 경력에서 유 전 의원은 김 의원을 압도했다. 반면 TK 토박인 탓에 경기도와는 연고가 없고 조직력도 약하다는 한계가 있었다. 유 전 의원은 이를 인물론과 중도 확장성으로 돌파할 각오였다. 그러나 결국 공천에선 윤심을 업은 김 의원에게 큰 차이로 밀렸다. 대선 경선에서는 박근혜의 벽을 실감했다면, 지방선거 공천에서는 윤석열의 벽을 체감해야 했다. 
 
22일 국민의힘의 6·1 지방선거 경기도지사 후보로 확정된 김은헤 의원이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경기도의회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경기도지사 경선 탈락과 관련해 한 유승민계 의원은 "유 전 의원이 올해 겨우 60대 중반인데, 벌써부터 '정치인생 마감'을 운운하기엔 너무 젊다"며 "조만간 향후 거취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최병호 기자 choib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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