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병호 기자] 제13대 대통령을 역임한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향년 89세의 일기로 영면했다. 노 전 대통령은 군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 멤버로 12·12 군부 쿠데타를 주도하고, 이후 구속까지 되는 아픈 그림자가 있다. 반면 직접선거로 당선된 첫 대통령이자, 공산권 국가 등과 교류하는 북방외교를 추진하고, 남북관계 전환의 바탕이 되는 기본합의서를 채택했다는 긍정적 측면도 있다. '빛과 그림자'라는 말처럼 상반된 삶을 살았다.
육사 11기 입교…'반란동지' 전두환 만나다
노 전 대통령은 1932년 12월4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1951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입교했다. 그는 육사에서 평생의 동지인 전두환씨를 만났다. 노 전 대통령은 전씨와 육사에서 같은 방을 썼다고 전해진다. 노 전 대통령은 공부를 잘했고, 전씨는 운동에 뛰어났다. 두 사람은 후일 육사 11기를 주축으로 구성된 하나회의 핵심 멤버가 된다. 하나회는 4공화국 당시 만들어진 군내 불법 사조직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별세했다. 노 전 대통령은 지병으로 오랜 병상 생활을 해왔다. 최근 병세 악화로 서울대병원에 입원에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눈을 감았다. 사진은 1991년 노태우 대통령이 UN헌장 의무수락 선언서에 서명을 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노 전 대통령의 인생 전환점은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 쿠데타다. 노 전 대통령은 5·16 이후 전씨와 함께 육사 생도 및 장교단의 '혁명 지지 행진'을 기획, 주도했다. 이 일로 두 사람은 박 전 대통령의 총애를 받게 되며 정치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 노 전 대통령은 월남 파병 후 수도경비사단 대대장, 공수특전여단장 등의 육군 핵심 보직을 거쳤다. 이후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청와대 대통령경호실 행정차장보, 작전차장보 등도 역임했다. 박 전 대통령이 피살된 1979년 10월26일에는 육군 9사단장에 재직 중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피살된 후 하나회를 주축으로 한 군부세력은 12·12 군사반란을 감행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명령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전두환씨(당시 보안사령관)를 지원했다. 노 전 대통령은 9사단 예하 29연대와 30연대를 동원, 반란에 가담했다. 하나회 멤버이자 12·12 쿠데타 성공의 1등 공신이 된 노 전 대통령은 반란에 저항하다 쫓겨난 장태완 소장의 후임으로 수도경비사령관까지 올라갔다.
전두환 후계자에서 대통령 당선까지
전두환정권이 들어서자 노 전 대통령은 정권 2인자가 됐다. 반란의 공신이자 전씨와 육사 때부터 함께 한 동지관계가 힘을 얻었다. 노 전 대통령은 1981년 대한민국 국군보안사령관(육군 대장)을 끝으로 예편한 뒤 정치에 입문했다. 정권 2인자답게 정치 입문 후 경력도 화려했다. 정무제2장관과 체육부 장관,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장관, 올림픽조직위원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다만 정권의 2인자로 불린 탓에 전씨의 집중 견제도 받았다. 그는 결국 1985년 올림픽조직위원장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별세했다. 향년 89세다. 사진/뉴시스
노 전 대통령은 이후 국회로 건너가 12대 국회에서 민주정의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활동했다. 제5대 민주정의당 대표위원도 지냈다. 전두환정권이 국민들에게 폭압을 행사할 때 행정부에서 몸을 빼 국회로 간 것이 노 전 대통령에겐 천운이었다.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으로 정권에 대한 반발과 대통령 직선제 등 민주화 요구가 강해지자 전두환씨는 노 전 대통령을 후계자로 지목, 여당 후보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1987년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겠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한 뒤 6월 항쟁을 겪자 직선제 개헌을 전격 수용하는 6·29 선언까지 이르게 된다. 이어 그해 12월16일 13대 대선에서 노 전 대통령은 36.64%를 득표, 김영삼 통일민주당 후보(28.03%)를 제치고 당선됐다.
'보통사람의 위대한 시대'는 노 전 대통령이 13대 대선에서 내건 슬로건이었다. 장기간에 걸친 군부독재에 피로감을 느낀 국민들의 불안함과 정서를 의식, 독재를 종식하고 보통 서민들의 민주주의를 표방하겠다는 전략이 담겼다. 동시에 군부 쿠데타 세력과 군부독재 2인자라는 꼬리표를 지우기 위해 노력한 흔적도 엿보였다. 물론 노 전 대통령의 당선에는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의 단일화 실패가 결정적이었으며, 이로 인해 영·호남은 둘로 갈렸다.
'보통사람' 내건 첫 직선제 대통령
노 전 대통령은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제13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재임 기간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 기승을 부리던 각종 강력범죄와 조직범죄를 소탕했다. 북방외교도 단행했다. 중국과 소련 등 공산권 국가를 중심으로 45개 국가와 새로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북방외교는 한국 외교의 역량과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무엇보다 국제정세 변화 속에 '고립'의 외교를 벗어나게 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된다. 또 본인이 올림픽조직위원장으로서 개최에 성공한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의 업적 가운데 가장 높게 평가되는 건 남북관계의 근본적 개선이다. 1991년 9월 노 전 대통령은 북한과 국제연합(UN) 동시 가입이라는 '빅이벤트'를 성사시키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북방외교를 통해 중국과 소련 등 공산권 국가와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북한을 앞뒤에서 권유한 결과다.
그해 12월 서울에서 열린 남북 고위급 회담을 통해서는 남·북한 화해와 상호 불가침, 교류협력 등을 골자로 한 남북 기본합의서를 채택했다. 남북 기본합의서는 이후 보수정부와 민주정부를 아우르는, 대북 정책의 기초로 활용됐다.
노 전 대통령은 집권 이후 '5공 청산'도 주창했다. 본인도 군부 쿠데타 세력이었지만 '보통사람'을 슬로건으로 내건 상태에서 사회에 남은 군부독재 흔적을 지우겠다는 취지였다. 노 전 대통령은 전두환씨 구속에 대한 요구가 빗발치자 민심이 가라앉을 때까지 조용한 곳에 가 있을 것을 권고했다. 결국 전씨를 설악산 백담사에 유배 보내는 수준에서 정리했다. 일각에선 '군부독재 청산'이 '백담사 쇼'라는 비판도 나왔다.
퇴임 후엔 전두환과 구속…2002년 이후 투병생활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 퇴임 2년 뒤인 1995년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전두환씨와 함께 구속기소됐다.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 혐의다. 대한민국 역사상 첫 직선제 대통령은 첫 전직 대통령 구속 기록까지 세웠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은 전씨와 함께 12·12 쿠데타와 5·18 광주항쟁 유혈 진압 등에 관여한 혐의로 1997년 4월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억원을 최종 선고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그해 12월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사면됐다.
노 전 대통령은 추징금 납부를 거부한 전씨와 달리 추징금을 모두 납부했다. 특히 5·18과 관련해 아들 재헌씨는 여러 차례 광주 5·18 민주묘지를 찾아 아버지를 대신해 사과했다. 전두환씨가 '계좌에 29만원 밖에 없다"면서 추징금 납부를 거부하고,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을 받는 것과는 결이 다른 행보다. 재헌씨는 지난 4월에도 광주를 찾아 "5.18 영령들을 마음 깊이 추모하며 광주의 정신으로 진정한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대한민국을 염원합니다"라고 방명록에 적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전립선암 수술 이후 건강이 악화된 데다 희소병인 소뇌위축증을 앓으며 오랜 기간 병상에 있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이후 공식 석상에 나서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그가 별세한 이날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총에 쓰러진 지 42주기다.
2020년 5월29일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재헌씨가 광주시 남구 오월어머니집을 찾아 사무총장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뉴시스
최병호 기자 choibh@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