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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대선 관전 포인트 ④)역대 정권 재창출 사실상 두 번…그때는 어땠나

정권재창출 성공위해 '중도층표심·개혁정책·단일화' 관건

2021-05-03 06:00

조회수 : 2,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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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토마토 장윤서 기자] 역사상 진보와 보수는 각각 한 번씩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 진보 진영에서는 2002년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보수 진영에서는 2012년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재창출을 이뤘다. 2022년 대선을 앞두고 2002년, 2012년에서는 어떻게 정권 재창출을 이뤘는지 그 역사를 정리해봤다. 당시 진보·보수 정당들은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 중도층 표심 확보에 주력하고, 개혁정책을 과감히 추진했으며 단일화를 통한 집토끼 지키기 등을 추진했다. 
 
2002년 '이회창 대세론' 꺾은 노무현 열풍
 
2002년 대선 초기만 하더라도 '이회창 대세론'이 휩쓸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초반부터 전체 여론조사 1위를 달렸다. 당시만 하더라도 새천년민주당에서는 이인제 후보가 40% 넘는 지지로 당 대권후보가 될 것으로 예상됐다. 이에 양자 대결로 이회창 이인제 후보구도로 볼 때 이회창 후보가 압승한다는 결과도 나왔다. 
 
이회창 대세론은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세 아들이 모두 비리에 가담된 사실로 밝혀지면서 힘을 받았다. 이회창 후보는 ‘구태정치 탈피’, ‘정권교체’를 강하게 요구하면서 개혁 이미지를 구축했다.
 
하지만 2002년 3월 이회창 대세론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당시 새천년민주당에서 한국 정당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참여경선제'를 도입했다. 그간 정당 보스들이 장악한 공천권을 국민들에게 돌려주고 일반 국민의 관심을 유도해 후보 인지도를 높이겠다는 의도였다. 
 
노무현 후보는 국민참여경선을 통해 광주에서 바람을 일으키더니 전국에서 '노풍'을 일으켜 당내 이인제 대세론을 꺾고 대선후보로 확정됐다. 경선은 주말과 휴일에 치러졌는데 노풍 대역전극이 펼쳐지자 '16부작 주말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는 말까지 돌았을 정도다. 
 
하지만 선거를 한 달 반 남겨둔 시점에서 조차 이회창 대세론이 무너지진 않았다. 2002년 11월에 실시된 KBS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나라당 이회창 36%, 국민통합21 정몽준 22%,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22.1%로 1위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노무현 후보가 반격에 나섰다. 지지율 2위를 기록하고 있는 정문준 후보와 단일화에 성공한 것. 하지만 대세론에 취했던 당시 한나라당 대선기획단에서는 두 후보의 단일화에 주목하지 않았다. 'JP(김종필)에게 도움을 청하라' 등과 같은 조언도 있었지만 이회창 후보는 듣지 않았다. 
 
또 노무현 후보는 행정수도를 충청으로 이전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충청 민심을 잡았다. 반면 이회창 후보는 TV토론회에 나와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맹비난을 퍼부었다. 
 
2002년 12월 19일 대선 하루 전날 돌발상황이 터졌다. 정몽준 후보가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함으로써 막판 뒤집기를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 먹혀들지 않았다. 2030 젊은세대가 인터넷에서 밤새 움직이면서 노무현 후보 당선을 도왔다. 노무현 후보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팬클럽(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진 대통령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회창 후보는 2017년 책 '이회창 회고록'을 내고 노무현 후보에 패배한 원인을 분석했다. 그는 당시 선거 승패를 좌우하는 중도층을 설득하지 못했고, 대세론이 1년 넘게 이어지면서 '오래 봐 지겨운 얼굴', '기득권'이 되어버렸다고 설명했다. 또 한나라당이 인터넷 매체 홍보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점 역시 패인으로 지목했다.  
 
노무현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을운동회가 지난 008년 오전 경남 김해시 진영읍 진영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가운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 노사모 회원들을 향해 시축을 한 뒤 손을 들고 보이고 있다. 사진/뉴시스
 
2012년 문재인에 맞서 간발의 차로 당선된 박근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는 박정희 전 대통령 딸이라는 후광도 봤지만 '독재자의 딸'이라는 꼬리표는 대통령 당선에 위험 요소였다. 그럼에도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시대 흐름을 잘 읽고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2011~2012년 '안철수 현상'이 온 사회를 휩쓸었다. 안철수 대표는 2012년 책 '안철수의 생각'을 통해 정치가 국민들의 생각을 반영하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여기에 격차가 심화된 경제시스템 등도 안철수에 대한 높은 지지로 이어졌다. 
 
실제 2008년 광화문 광장에서는 한미 FTA개정을 통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가 꾸준히 열리고 있었다. 이명박 정권은 광화문과 청와대 인근을 컨테이너로 둘러막으며 이른바 '명박산성'을 구축했다. 또 2009년에는 용산참사로 분노를 샀다. 이명박 정권은 '불통', '권위주의' 이미지를 쌓았다. 
 
국민들끼리는 각 사안에서 진보와 보수가 나뉘어 대립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경제도 심상치 않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한국사회에도 불황이 이어지며 경제위기론도 솔솔 터져 나왔다. 
 
박근혜 후보는 자신의 당선이 곧 '이명박 정권 교체'라고 인식되도록 했다. 이명박 정권의 '불통' 이미지와 정반대 행보를 한 것이다. 당내 경선 시작된 첫날 박근혜 후보는 첫 일정지로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찾아 참배했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박근혜 후보가 이념, 계층, 지역, 세대를 넘어 국민 대통합의 길을 열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풀이했다. 언론에서는 '파격', '광폭 행보'라 평가했다. 
 
또 경제위기에 대응하겠다며 '경제민주화'를 추진하겠다고 했다. 경제민주화 정책의 핵심에는 대·중소기업 상생과 공정경쟁 가치를 담았다. 당시 한나라당은 '친재벌 정당'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이를 '민주적 시스템'으로 개혁하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박근혜 후보는 보수결집에도 사활을 걸었다. 박근혜 후보는 새누리당과 선진통일당과 합당,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총재의 지지선언, 친이계 이재오 의원 합류 등을 추진하면서 보수 대통합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민주통합당은 당시 문재인 후보가 패배한 원인을 분석한 '대선평가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는 문재인 후보가 당 장악력, 캠프 운영 등에서 미숙함을 보였다고 했다.
 
민주통합당은 안철수 후보가 문재인 후보와 단일화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안철수 후보와 맞서기 위해 박근혜 맞서 단일화를 추진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단일화 이후 안철수 후보가 독자적인 방식으로 지지유세를 한 것엔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결과적으로 양쪽 지지자들의 갈등을 봉합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구체적인 대선 전략 부재와 계파갈등이 주요 패배 요인으로 지목받았다.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2010년 오전 서울 삼성동 코엑스 그랜드볼룸에서 '국가미래연구원' 발기인대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장윤서 기자 lan4863@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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