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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기자의 '눈')수에즈 운하 사태와 일본 조선

2021-04-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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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즈 운하를 가로막았던 초대형 컨테이너선 '에버기븐호'가 극적으로 물에 다시 떠올랐지만 이 배를 건조한 일본 조선사의 한숨은 깊어지고 있다. 수에즈 운하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최단 거리 뱃길로, 전 세계 교역량의 약 12%가 이곳을 지난다.
 
운하 한복판에 선박이 비스듬히 끼어버린 건 해상 물류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전례가 없기에 이 선박을 빼내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 예측하는 것조차 어려웠고, 여러 주가 걸릴 수도 있다는 예상이 나왔다. 전 세계 물동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해상 운임이 치솟는 상황에 주요 교역로가 막혀버리자 물류 대란으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22만톤(t)에 달하며 2만개의 컨테이너를 실은 이 거대한 선박은 어쩌다 좌초한 걸까. 아직 원인이 밝혀지진 않았으나, 사고 당시 강풍과 모래폭풍이 불며 기상 상황이 좋진 않았던 걸로 알려졌다. 에버기븐호의 선박 기술관리 회사인 버나드슐테선박관리(BSM)는 이런 기상 악화로 선체가 흔들리면서 배가 수에즈 운하에 끼게 됐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아무리 강풍이 불었더라도 묵직한 선박이 좌초될 수 있냐는 의구심이 제기됐고 자연스레 시선은 기술 결함 혹은 선장의 운항 실수 아니냐는 쪽으로 쏠리고 있다. 이에 따라 에버기븐호를 건조한 일본 1위 선사 이마바리조선에도 불이 떨어지게 된 것이다.
 
에버기븐호는 컨테이너선 중에서도 최대 규모에 속한다. 해운사들이 점점 더 큰 선박을 원하면서 최근 몇 년간 조선 시장은 누가 더 큰 배를 만드냐의 싸움이었다. 이 와중에 이마바리가 만든 초대형 컨테이너선이 좌초하면서 일본 대형 선박 기술력에 대한 지적이 제기된다. 거대한 선체가 받게 될 풍향과 풍속을 고려해 추진하는 설계 능력이 애초에 부족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사고 발생 초기 선박의 전기 장치에 문제가 있었다는 보도도 이어지면서 일본 조선업의 자존심은 계속해서 구겨지고 있다.
 
1980년대 초반까지 1위이자 세계 조선 발주량의 절반 이상을 수주하며 한국과 중국을 발밑에 뒀던 일본 조선은 왜 이 지경이 됐을까. 배경은 무리한 구조조정과 전문 인력을 양성하지 않은 데 있다.
 
일본 조선의 침몰은 1980년대 석유 파동 이후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강행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주요 조선소들은 합병됐고 핵심 설계 인력들은 정리되면서 경쟁력을 서서히 잃게 됐다. 1999년 도쿄대를 시작으로 대학 내 조선학과를 폐지하면서 신규 선박 설계 인력 배출도 끊겼다. 이에 따라 환경 규제로 인해 빠르게 변하는 선박 트렌드를 주도하긴커녕 쫓아가기도 힘들어졌다. 
 
최근에는 오랜 파트너였던 대만 선사 에버그린의 초대형 컨테이너선 수주 경쟁에서도 발주량 20척 전부를 한국 삼성중공업에 빼앗기는 굴욕을 맛봐야 했다. 에버그린은 이번에 좌초한 에버기븐호를 소유한 선사다. 2015년 28%에 달했던 세계 시장 점유율은 이젠 10% 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기술력에서는 한국에, 가격에서는 중국에 밀린 결과다.
 
기술 투자에 머뭇거린 사이 쇠락해버린 일본 조선을 보며, 1위를 달리는 한국 조선사들이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망망대해에서 방향키를 제대로 잡지 않으면 일본 조선업처럼 언젠간 길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지영 산업1부 기자 wldud91422@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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