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백아란 기자] 글로벌 암호화폐(가상통화·암호화자산) 시장에 투자열풍을 불러일으켰던 한국이 정부의 규제 선언 1년 여만에 ‘갈라파고스’로 전락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정부가 ‘모든 형태의 암호화폐공개(ICO·Initial Coin Offering)를 전면금지 한다’고 밝힌 이후 이렇다 할 가이드라인을 내놓지 않으면서, 국내 암호화폐 거래소와 블록체인 프로젝트들이 해외 시장으로 빠져나가고 있어서다. 특히 싱가포르, 스위스 등 글로벌 국가에서 암호화폐와 블록체인 육성 산업이 제도화되면서 시장 고립도 가속화되는 모습이다.
사진/픽사베이
뒷짐 진 정부에 암호화폐 시장 엑소더스 가속화
27일 ICO시장분석업체 ICO레이팅(Rating)이 발표한 분기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2분기 전 세계 827개의 블록체인 기업이 ICO를 통해 83억5997만달러(한화 9조887억원)을 유치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1분기(33억달러) 대비 2.5배 늘어난 규모다.
국가별로는 미국에 설립된 ICO법인이 70개로 가장 많았으며, 싱가포르(57개)와 영국(49개), 에스토니아(35개), 스위스(25개) 등이 뒤를 이었다. 특히 ICO법인 가운데 16개가량은 한국인 주축으로 설립된 것으로 추정됐다. 정부의 규제망을 피해 해외시장으로의 엑소더스가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한국은 중국과 더불어 전세계 유일하게 ICO 전면금지 입장을 취하고 있는 국가다.
앞서 금융당국은 작년 9월29일 증권 발행 형식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ICO를 금지했으며, 올 초부터 암호화폐 거래소에 대한 실명제를 도입하는 등 규제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유사수신행위와 투기, 사기 등의 문제를 막기 위한 조치다.
관련 대책 역시 작년 말 ‘가상화폐 긴급대책’과 ‘자금세탁방지 가이드라인’이 발표된 이후 나오지 않고 있으며, 국회에 발의된 5개의 법안은 모두 계류 중인 상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정부가 육성하고자 하는 ‘블록체인’ 산업 성장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암호화폐는 위·변조 방지와 탈중앙화, 스마트 컨트랙트 등 블록체인의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암호화폐 거래 또한 정부 규제로 영향을 받고 있다. 특히 올해 2월 전세계 암호화폐거래소 1위를 차지했던 업비트의 경우 11위(27일 코인힐스 기준)으로 떨어졌으며 빗썸도 8위에 머물고 있다.
반면 싱가포르나 스위스 등 암호화폐 산업에 개방적인 국가에서는 아예 ‘크립토밸리(암호화폐도시·Crypto valley)’를 조성해 사업유치에 적극 임하고 있다. 실제 스위스는 2016년 추크시를 암호화폐 특성화 도시를 선언하고 국가 차원에서 암호화폐 육성을 도모하고 있다. 이로 인해 10만명의 일자리 창출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제주도 블록체인 특구 조성·금감원, 실태조사에 '촉각'
암호화폐의 성지로 꼽히는 싱가포르 또한 ICO와 관련해 규제 샌드박스(일정 기간 규제 없이 사업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했으며, 우즈베키스탄은 정부 승인 아래 암호화폐 거래소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밖에 태국 정부는 암호화폐 거래소를 제도권으로 편입시켰으며 러시아 정부 또한 암호화폐를 자산으로 규정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기술력과 아이디어를 가진 국내 유망 블록체인 스타트업은 해외에서 프로젝트 유치하게 되는 것이다. 업비트, 빗썸, 코인원 등 암호화폐 거래소 역시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으로 해외 진출에 나서고 있다.
블록체인 업계 한 관계자는 “암호화폐 시장이 성장 초기 단계에 있다 보니 해킹이나 사기 등 혼탁한 면도 갖고 있다”면서도 “(암호화폐의) 부정적인 면만 보고 관련 산업을 아예 외면해버린다면 한국에서는 더 이상 블록체인 산업이 성장할 수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관계자는 “정부가 ICO를 금지한다고 했지만, 사실상 해외 법인 설립을 통해 우회적인 방법으로 ICO가 이뤄지고 있다”며 “암호화폐 거래소나 블록체인 프로젝트가 해외에서 자리를 잡게 되면 이에 따른 일자리나 자본도 유출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한편 시장에서는 제주도에 조성될 ‘블록체인 특구’ 실현 가능성과 금융당국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다.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2000억원 규모의 제주 4차산업혁명 펀드 등을 통해 ‘제주도 블록체인 특구’를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금융감독원 차원에서 ICO실태조사가 실시된 데 따른 것이다.
최근 금감원은 ICO를 진행했거나 진행 중인 회사를 대상으로 ‘ICO 실태’를 점검했다. 여기에는 ICO진행 관련 사항이나 계약관계, 프로젝트 내용 등이 담긴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ICO 제도화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냐는 전망이 제기됐다. 금감원은 ‘참고 목적’이라는 입장이다.
금감원 한 관계자는 “답변을 받아 질문서를 점검하고 있다”며 “(제도화를 위한 것은) 아니고, 실태 파악을 위한 업무의 참고 목적”이라고 선을 그었다. 설문 내용이나 기업 등에 대해선 “공개하기 어렵다”면서도 “필요하다면 향후 감독 업무에 일부 참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아란 기자 alive0203@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