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경
서울대 글로벌환경경영전공 겸임교수
평창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지난 16일간 즐거웠다. 대한민국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마음을 졸였고, 아쉬움에 탄식하기도 했다. 때로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보낸 나날도 있다. 막상 올림픽이 끝나고 보니 메달 색깔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싶다. 세계 선수들과 겨뤄서 순위권에 들고 메달을 딴 것만 해도 장하고 대견한 일이다. 메달을 목에 걸지 못하고 예선에서 탈락했다고 하더라도 어찌 그 투혼이 빛나지 않겠는가. 4년 아니 그보다 훨씬 오랫동안 올림픽 무대에서 겨루기 위해 기량을 갈고닦느라 인고의 세월을 보낸 선수들과 감독·코치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런데 올림픽이 끝나자 그간 잊고 있었던 걱정들이 앞선다. 풍전등화와 같은 한반도의 앞날 때문이다. 한미 합동 군사훈련은 양국 당국자들의 노력 끝에 올림픽 이후에 하는 것으로 늦춰지기는 했으나 '천안함 폭침 혐의'를 받는 북한군 당국자의 폐막식 참석을 둘러싸고 정쟁이 불붙었다. 급기야 그의 방문을 앞두고 통일교에 드러누웠던 야당은 날카로운 공세도 준비 중이다. 남북 선수들은 한반도기를 앞세워 입장했고, 여자 아이스하키는 단일팀으로 출전해 남북의 마음을 이어주었으며, 북한 응원단원이나 공연단원들은 "통일은 하나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행보가 어디까지 지속될 것인지 불안하다.
이번 올림픽 개막식 때는 미국의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방한했고, 폐막식 때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딸 이방카 백악관 고문이 왔다. 그럼에도 이들이 북미대화를 겨냥해 평창에 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 당국자들의 노력으로 북미대화가 성사될 수도 있었겠으나, 미국 당국자들의 발언만으로 미뤄보면 대화 쪽보다는 오히려 경계와 경고의 색채가 짙다. 올림픽 현장을 보고 남북 평화무드 정착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망을 체험한 펜스나 이방카가 마음에 동요가 생겼을지라도 미국에 있는 당국자들에게는 "남북이 미국을 넘어 정말 가까워지면 어떻게 하나"라는 불안감이 엄습했을 수도 있다.
우리 대통령과 정부는 그동안처럼 백척간두의 한반도 위기를 잘 풀어나가리라 믿는다. 그러면서도 일말의 불안감도 있다.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사실은 남북의 정서와 미·중의 사고가 서로 다른 법적·정치적 기반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남북통일과 교류협력의 증진에 중점을 두고 있으나 미국과 중국은 여전히 그들이 한국전쟁 이후 서명한 <군사정전협정>(1953년)에 기초해 한반도를 바라본다. 군사정전협정 관점에서 보면 남북과 그 동맹국들은 잠시 휴전을 한 것뿐 전쟁을 종료한 게 아니다. 이 사실을 전제로 한다면 남북은 외교적 행보를 서두를 수 없는 구조다.
한반도에서는 지금까지 군사정전협정과 남북교류협력이라는 두 개의 '경로(Track)'가 각축했다. 원칙적으로 보자면, 군사정전협정에 서명한 북한은 협정 상대방인 미국에 직접 대화를 제안할 수 있으나 우리나라는 미국과 북한에 대화를 권고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는 서명 당사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남북교류협력을 재개할 수는 있었으나 군사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꿀 수는 없었다. 그동안 북한은 한반도 평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 머리 위로 미사일을 날리면서 미국을 도발하는 기염을 토해왔다. 북한은 이제 스스로 핵무기 보유국가라고 주장하면서 미국과의 대화를 원하지만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미국은 핵 개발 저지에 총력을 기울인다.
북한과 미국 사이에 누적된 불신과 적개심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도 불사하겠다는 미국 당국자들과 그들의 배후에 버티고 선 공화당을 무슨 수로 무마할 수 있을까. 독도를 자국 영토에 편입시키려고 사활을 거는 일본도 미국 못지않다. 일본은 미국이라는 지렛대를 이용, 한반도에 깊숙이 개입한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이런 복잡한 역학관계 속에서 한반도 평화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통일을 향한 행보는 남북한 모두에 절체절명의 소명일 수 있겠으나 동아시아와 태평양에서 패권을 겨루는 미국과 중국에게는 이 문제가 거북한 장애물로만 여겨진다. 미국은 여전히 우리의 맹방이지만 우리가 냉전의 첨단에 서 있을 때만 그렇다.
국제정치적으로 그리고 국제법상으로 우리가 북측의 협력을 얻어 지금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은 남북 교류협력을 확대·증진시키는 일이다. 그간에 막혔던 것들이 이번 올림픽으로 겨우 통로를 열었을 뿐이다. 문화와 예술, 관광뿐만 아니라 동포애에 기반을 둔 숙원사업들도 남아 있다. 남북 환경보전과 경제교류도 그 뒤를 따를 수 있다. 통일은 막대한 비용문제 때문에 내부에서도 반대를 부를 수 있다. 교류협력을 확대하다 보면 통일은 어느 날 불시에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교류협력을 강화하려면 힘들더라도 적법절차를 따라야 한다.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적법절차 경로는 사전통지(Prior notice)와 청문(Hearing)이다.
전재경 서울대 글로벌환경경영전공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