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뜬금없이 유명해진 포유류가 있다. 레밍(Lemming)이 바로 그것. 우리말로는 나그네쥐다. 멋지다. 나그네라니… 만약에 레밍이 우리나라에 살았다면 금세 멸종되고 말았을 것이다. 덩치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몸길이가 15센티미터 정도로 크다. 그런데 꼬리의 길이는 기껏해야 2센티미터. 두 숫자만 봐도 레밍은 추운지방에 사는 동물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툰드라 지방에 주로 산다.
아마 레밍을 우리나라 시민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준 사람은 존 위컴 전 주한미군사령관일 것이다. 그는 매우 기분 나쁜 말을 했다. “한국인은 들쥐와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지 그를 따른다. 민주주의는 한국인에게 적합한 제도가 아니다.” 이런 @#$%& 같으니라고. @#$%& 같은 반응은 오늘날의 시각이고 그가 발언했던 1980년에는 딱히 반박할 수도 없었다. 위컴은 광주에서 수백 명을 죽인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을 지지하는 한국인을 보고 이런 험한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가 한국인을 비웃은 것인지 안타까워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쨌든 그의 생각과는 달리 민주주의는 한국인에게 아주 적합한 제도라는 게 드러났고, 이제는 우리가 미국인들에게 한국 시민들의 촛불혁명에서 민주주의를 배워야 한다고 오히려 큰소리를 칠 지경이 되었다.
위컴은 레밍이 아니라 들쥐(field mice)를 말했다. 말 그대로 들쥐다. 하지만 그가 말한 내용을 보면 실제로는 레밍을 말하고 싶었는데 단어를 몰랐던 것 같다. 위컴에 비하면 충주에 거주하는 김 모 씨는 훨씬 풍부한 어휘력을 갖춘 분이다. 그는 어떤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세월호부터도 그렇고, 국민들이 이상한, 제가 봤을 때 뭐 레밍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집단 행동하는 설치류 있잖아요.”라고 말했다.
김 씨가 이런 볼멘소리를 하게 된 까닭을 이해 못할 바가 아니다. 그의 말대로 지방의원이 무소불위의 특권을 가진 집단도 아닌데, 관광이 아니라 정말로 중요한 연수를 하러 왔는데, 사진이나 찍는 보여주기 식 수해복구 봉사를 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준비하고 이미 비용까지 지불한 연수를 포기하기가 아깝고 안타까웠을 것이다. 의원 연수와 흉내 내기 수해복구에 대한 김 씨의 입장은 나름 타당해 보이지만 언론의 질타를 받고 있다. 미안하지만 그게 선출직의 운명이다. 시민의 감정에 충실해야 한다.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성수대교 붕괴에 무슨 책임이 있다고 사과를 해야 했겠는가? 국민의 감정에 충실했던 것이다.
내가 위컴 사령관과 김 씨의 발언에 유감인 까닭은 따로 있다. 그들은 레밍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사회에 널리 전파했다. 레밍을 멍청하게도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동물로 묘사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레밍을 대표적인 어리석은 설치류로 여기게 했다. 레밍은 그런 동물이 아니다. 자연은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
레밍은 1년에 열 마리 정도의 새끼를 낳는다. 개체수가 매년 다섯 배로 늘어나는 셈이다. 그런데 특정 지역의 레밍 개체 수는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일이 없다. 가끔가다가 레밍의 숫자가 확 줄어드는 일이 반복된다. 레밍은 환경이 포용할 수 있는 개체수가 넘어섰다고 해서 약한 개체를 죽이지 않는다. 대신 건강한 개체들이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난다.
대규모로 이주하는 레밍의 이동 장면이 자주 관찰된다. 희한하게도 레밍은 직선으로 이동한다. 큰 규모의 쥐떼가 이동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다. 그러다보니 절벽이나 강이 나와도 돌아가기 보다는 뛰어내리고 헤엄쳐 건넌다. 레밍이 절벽에서 강으로 뛰어드는 것은 자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빨리 이동하기 위해서다.
쥐의 눈은 극도의 근시안이다. 기껏해야 자기 몸길이 정도의 거리까지만 제대로 보이고 그 뒤는 그저 뿌옇게 보인다. 그러다보니 고양이가 빤히 쳐다보는데도 그 앞을 지나다가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래서 쥐들은 야행성으로 산다. 캄캄한 밤에는 시력이 좋든 나쁘든 생존에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시력이 안 좋은 레밍은 간혹 바다를 강으로 착각하고 뛰어든다. 이런 경우가 집단적인 죽음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맹목적인 추종 끝에 자살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곳을 찾아 탐험을 나섰다가 장렬하게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만약에 김 씨가 국민을 레밍이 아니라 호랑이에 비유했어도 우리가 그렇게 화를 냈을까? 설치류를 우습게보지 말자. 레밍은 익숙한 장소를 다음 세대에 넘겨주고 새로운 곳을 찾아 목숨을 건 탐험을 떠나는 노마드다. 우리도 레밍만큼만 하자.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