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상당수 재벌들은 3·4세 시대에 접어들었거나 승계를 준비 중이다.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와병 속에 지난해 5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삼성문화재단 이사장에 오르면서 사실상 3세 시대를 열었다. 두산도 지난 3월 박정원 회장이 그룹 회장직에 공식 취임하면서 4세 경영에 돌입했다. 이밖에 정의선 현대차그룹 부회장,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조현준 효성 사장, 정기선 현대중공업 전무, 김동관 한화큐셀 전무, 구광모 LG 상무, 이선호 CJ제일제당 과장 등도 3·4세 시대를 열 후계자로 주목받고 있다.
◇운전기사 상습 폭언·폭행 등 갑질 논란에 휩싸인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이 3월25일 서울 수송동 그룹본사에서 열린 정기주주총회에서 사과문을 읽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들은 일반 샐러리맨들이 상상할 수 없는 나이에 초고속 승진을 하며 후계자 입지를 굳혔다. 대다수 '흙수저'들의 상대적 박탈감 속에 뚜렷한 경영능력 검증이나 족적 또한 없어 선대 회장들이 일군 성장 신화를 핏줄만으로 물려받는다는 세습 논란이 뒤따랐다. 또 일부 경영 성과들도 그룹 차원의 전폭적인 지지 또는 치장된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데 재계 관계자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오히려 2007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보복폭행, 2010년 최철원 SK M&AM 전 대표의 맷값 폭행, 2013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아들의 부정입학 의혹, 2014년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회항, 그리고 최근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의 운전기사 폭행까지 숱한 논란만 낳았다. 오랜 기간 총수 일가를 보필해왔던 한 그룹사 관계자는 "현실은 영화 '베테랑'을 뛰어넘는 수준"이라며 "내 회사를 내 마음대로 하는데 왜 외부에서 문제를 삼는지 이해를 하지 못한다. 사고 자체가 다르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사회적 물의를 넘어 횡령과 배임, 탈세, 비자금 조성 등 대부분의 경제범죄가 이 연장선상에서 발생한다. 3·4세의 삐뚤어진 소유의식에서 불거진 각종 불법은 검찰 조사와 구속 등 오너 부재에 따른 의사결정 지연과 기업의 체질 개선 등을 늦출 수 있다는 점에서 해당 기업으로서는 재앙이다. 또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글로벌 경쟁 체제에서 기업의 경쟁력 약화로 직결될 수밖에 없다.
본지가 지난해 창간특집으로 조사·발표한 <2015 대한민국 재벌 명성지수>를 보면, 3·4세 문제로 촉발된 리스크가 해당 그룹에 얼마나 치명적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재벌의 사회전반 영향력, 호감, 경제성장·사회발전 기여도, 경영능력 등을 지수화해 조사한 결과, 조현아·현민, 원태 등 한진 남매가 최하위를 기록했다. 땅콩회항 여파였다. 한화, 현대중공업, 효성, SK 등 3·4세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기업들도 하위권에 머물렀다. 막내아들의 "미개한 국민" 발언은 아버지 정몽준 현대중공업 대주주의 서울시장 선거를 패배로 이끌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현대, 삼성, 두산, 금호, 롯데 등 굵직한 그룹들 모두 2세로의 경영권 승계과정에서 형제 간의 다툼으로 휘청이는 사태를 경험해야 했다. 그때마다 한국경제도 출렁였다. 이는 3·4세 들어서도 재연될 가능성이 높은 잠재적 리스크다. 이미 효성이 형제 간 불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적통으로서의 자존심, 승자 독식 구도가 이어지는 한 이 같은 사투는 언제든 그룹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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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나라 재벌 지배구조는 특정 대주주와 그 친족의 지분 소유에 의존해 움직이는 폐쇄적인 지배체제다. 군주제를 방불케 하는 '1인 소유와 지배·경영'으로 일원화됐다. 이런 탓에 역량이 부족한 총수가 독단적인 의사결정을 내리거나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국민의 반감을 얻을 경우 기업의 수익성이 악화되는 것은 물론 생존까지 위태로워진다. 재벌 3·4세의 문제를 단순 해프닝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총수 1인지배 체제에서 재벌의 성장 원동력은 총수에 있다. 총수에 의존해 미래사업을 결정하고, 과감하고 장기적인 투자도 단행되어진다. 계열사별 독립경영의 시스템을 도입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결정권은 총수가 쥐고 있다. 이는 과거 산업화를 통한 고속성장의 원천이었다. 관치경제 체제에서 정경유착과 독점 등 잘못된 폐단도 낳았지만 그 치적만큼은 부인하기 어렵다. 기업을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절대적 존재다. 이 같은 후진적 체제에 대한 개선은 과제로 두고서라도, 당장 3·4세의 행태가 바로 잡히지 않는 한 국가경제의 미래는 없다.
김진방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는 "기업 경영이 회사의 공적 의사결정기구인 주주총회나 이사회를 통해 결정되지 않고 가족회의 등을 통해 전횡된다"며 "우리나라 재벌 체제와 3·4세의 병폐를 그대로 드러낸다"고 지적했다. 오일선 한국CXO 연구소장은 "재벌 1·2세들이 사업보국의 정신으로 한국경제를 이끌었다면 3·4세들은 고민과 견제 없이 경영권을 물려받았다"며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으로, 기업들은 오너 리스크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묵인하고 용인하는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국민들이 등을 돌렸다"고 경고했다.
최정표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우리 경제는 특정 재벌로 경제력이 집중되고 현실에 안주하면서 경제가 역동성을 잃어버리고 국가의 성장 자체가 침체됐다"며 "특히 재벌 3·4세들은 경영권을 세습한 후 사내유보금만 쌓고 안주하는 모습에서 벗어나 1·2세들이 가졌던 기업가정신을 회복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금 재벌에게 필요한 건 '안주'가 아닌 '도전'이다. 그 중심에 3·4세들이 있다.